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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조기대선 선언 배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민중의 힘을 보여준 한편의 드라마였다.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19일 조기 대선을 실시하고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피플 파워' 가 다시 힘을 발휘했음을 의미한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이날 사면초가에 몰렸다.

이날 군의 원로격인 육군사관학교 62년 졸업생들은 대통령 퇴임을 촉구하며 군 장성들에게 "위기 시기에 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이 나온 이후 수도 마닐라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 군병력이 집결하면서 쿠데타 설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10만명의 시위대가 마닐라에 집결했다.

그러자 에스트라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해 중지됐던 자신에 대한 탄핵재판을 재개하고 자신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비밀계좌를 탄핵검사들이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며 한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이날 오후 앙헬로 레예스 육군 참모총장과 올란도 메르카도 국방장관, 해군.공군 사령관 등 군 수뇌부들이 에스트라다의 사임을 요구하며 곧바로 시위대에 합류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태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들은 에스트라다에게 미봉책이 아닌 사임을 요구했다.

레예스 참모총장은 시위대에 "군은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을 지지하기로 했다" 고 밝혀 에스트라다를 더욱 옥좼다.

그는 또 "에스트라다 대통령과 가족들이 품위 있게 물러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이라면서 "우리가 복수심을 품지 않도록 해달라" 고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향해 말했다.

이들의 합류로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다.

일찌감치 반 에스트라다 진영에 섰던 레나도 데 빌리 전 국방장관은 이날 시위현장에서 군 주요인사를 한명씩 소개하면서 "군과 경찰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고 말하고 민중의 승리를 선언했다.

군부 실세들에 이어 호세 파르도 재무장관과 펠리페 메달라 경제기획부 장관도 잇따라 사임을 발표했다.

에스트라다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제서야 에스트라다는 아킬리노 피멘텔 상원의장과 아르눌포 우엔타벨라 하원의장을 만나 해결책을 논의했다.

면담 직후 에스트라다는 "새로운 대통령이 (탄핵재판을 통해)갈라진 국론과 경제위기에서 나라를 재건하기를 희망한다" 며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에스트라다의 임기는 2004년까지지만 올 5월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시위대와 반 에스트라다 인사가 그의 의사를 받아들일지 즉각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할지는 미지수다.

또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일단 조기 퇴진의사를 밝히기는 했으나 즉각적인 사임을 발표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군부와 시위대의 움직임을 더 주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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