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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깨달음 뒤의 깨달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내일과 내생(來生)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 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 눈덮인 고찰 일주문 앞에 서있는 수백년 노송에 비한다면 길어야 80년 안팎의 시한부 인생이 초라하다.

사랑하던 사람의 난데없는 부고장을 받고도 스케줄부터 챙기는 쳇바퀴 일상 속에 과연 '삶의 기초' 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티베트 고승 소걀 린포체의 깨달음에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도 '삶의 기초가 바로 죽음' 이라는 역설에 내포된 '죽음에 대한 특화된 가르침'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가 유난스럽게 죽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역사적.지리적 환경의 고난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역사가 외려 상대적으로 안락했을 수 있는 타 종파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종파라는 특수성과 한계를 넘어 욕망의 세계에 적실한 대안과 위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최첨단인 서양에서 티베트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신간 『깨달음 뒤의 깨달음』은 티베트 불교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소걀 린포체의 3백65일간 '명상 일기' 다.

린포체란 티베트 불교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존칭이다. 명상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는 티베트에서 태어나 전통 불교의 가르침을 받고, 이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해 불교의 핵심 교리를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며 설명할 수 있는 눈높이를 갖춘다.

◇ 명상을 통한 중도(中道)의 발견〓삶과 죽음을 명상한다는 것이 히말라야의 산 속에서 살면서 삶 전체를 명상수행에 바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일상의 삶을 소홀히 해선 안되지만 그 보다 더 깊은 삶의 의미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의 순간마다 균형을 잡고 중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핵심에서 동떨어진 활동이나 편견에 지나치게 말려들지 않는 것이며, 우리 삶을 좀더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 명상을 할 때도 휴식과 긴장의 미묘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

명상을 통한 중도의 발견은 티베트 불교의 핵심이다.

◇ 깨달음이 병이 될 수 있다〓그가 말하는 진리는 까다롭지도 은밀하지도 않다. 되레 상식에 대한 확인이다.

깨달음이란 "실제로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혹당하기를 멈추는 것일 뿐이다.

" 도(道)의 정수도 단지 헌신일 뿐이며, 명상수행의 궁극은 삶 속에서 불친절함과 악덕의 제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관성 탓이다. 특히 바른 견해(正見)을 얻었다는 자만심은 수행자의 최대의 병폐다.

"자신이 생각과 감정의 집착에서 해방된 진정한 수행자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부정적 카르마(業)를 축적할 따름이다. " 잘못된 깨달음은 병이 되는 것이다.

결가부좌의 명상법도 단지 수단일 뿐이다. 명상적 삶을 일상화하는 것, 그래서 명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잊어버려야 한다.

약을 한 번 먹었다고 영원한 건강이 보장되지 않듯이 한 번 깨쳤다고 완전한 깨달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듯 깨달음이란 영원한 과정,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티베트 불교의 명상이나 한국 불교에서 화두를 붙들고 참선하는 간화선(看話禪)이 크게 다르지 않다.

◇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스승〓이러한 깨달음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스승이 우리 옆에 늘 함께 있는 '죽음' 이며, 그 예방책은 '자비' 를 베푸는 일이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 때만큼 자비가 절실한 순간은 없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고통을 떠맡으며, 그의 부정적인 카르마를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자비의 보살행이 역으로 나를 정화시켜 준다. 삶의 의미를 다시 깨우치게 한다는 것, 그래서 "사자(死者)는 모두 우리의 스승" 이며 그 죽음은 '순교' 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결국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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