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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10시간]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이병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지난 15일은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영하 18도. 한강 이쪽에서 저쪽까지 14년만에 꽁꽁 언 날이기도 했다.

서울 시내 한 극장에서 '번지 점프를 하다' (2월3일 개봉)의 첫 기자 시사회가 열렸다.

강릉에서 드라마 촬영 중 무대 인사를 위해 날아온 이병헌(31)은 "작품을 끝내고 시험대에 오르는 일은 오늘 날씨만큼이나 고통스럽다" 고 털어놓았다.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몇 번 대면한 적이 있는 그였지만 그날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시사회가 끝난 후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초조해 보였지만 가끔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은 역력했다.

영화평이 어떨지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나중에 '10시간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이 한층 밝아진 것을 보고 "작품이 괜찮고, 연기도 잘했다" 는 평을 꽤 들었나보다라고 짐작했다.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95년) '런 어웨이' (96년) '지상만가' (97년) 등에서 이렇다할 인상을 남기지 못한 그는 여섯째 영화인 '내 마음의 풍금' (99년)에서 "제대로 연기했다" 는 소릴 듣고는 오히려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연기는 항상 하던대로 했는데 흥행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할 줄 안다.

"전에는 인물에 너무 몰입했나봐요. 그러니까 약간 '오버' 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머리를 긁적이며)요즘엔 시나리오를 받으면 인물보다 작품 전체를 파악해요. 좀 달라지고 있나 봐요. "

그렇다면 한국 최다의 관객을 동원한 '공동경비구역JSA' 는 모두를 향해 '내가 그 정도 밖에 안될 줄 알았느냐' 며 날린 장쾌한 펀치같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JSA' 이후 많이 달라졌을 듯 싶다.

"흥행 배우가 됐잖아요" 라며 그는 크게 웃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 속엔 그 동안 그가 겪었을 속앓이의 흔적이 묻어났다.

이어 그는 "영화계에 종사하는 분들의 대접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좋기도 하지만 좀 어색하죠. 그래도 어떤 제작자가 '연기가 달라졌다' 며 출연 제의를 해오면 아직 좀 섭섭하던데요. "

송강호가 '…JSA' 이후 작품을 신중히 고르는 것에 비하면 벌써 신작 '번지 점프를 하다' 를 내놓는 게 좀 빠른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고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윤회라는 독특한 소재를 끌어들인 영화로 첫사랑 여인이 죽어 17년 뒤 남학생 제자로 다시 태어나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주 독특한 영화라고 생각했죠. 멜로를 하고 싶었는데 눈물만 나게 하거나 보통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진부하잖아요. 명필름 이은 감독의 권유도 힘이 됐구요. "

영화가 공개되기 전 동성애 논란이 있었던 점에 대해서 그는 "영화에 동성애 코드가 있다는 걸 전혀 못 느꼈어요. 영화를 보면 주제가 동성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동성애 논란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구요. 정말 동성애 영화였다면 안했을 거예요. 제 사고가 아직 그 정도로 열려있지는 않거든요" 라고 말했다.

바쁜 일정 탓에 몸이 많이 축났다.

지난 연말에는 병원 신세도 졌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가 하루 한 갑 이상으로 늘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는 그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며 속내도 드러내놓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끝내고 좋은 평가를 들었을 때 쾌감이 있기 때문이죠. 가끔 몇 시간의 휴식도 그렇게 소중할 수 없구요. "

"결혼은 안할 거냐" 라는 질문에 그는 "너무 하고 싶어요" 라고 반색을 했다.

"시간이 있어야 연애를 하죠. " "참~내, 여자만 있어봐요. 전화는 뒀다 뭐합니까" 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 이병헌은…

고교시절 그는 영화 감독이 꿈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느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하기로 마음 먹고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사랑얘기가 있는 청춘영화였다.

뭔가 느낌도 좋았고 야릇한 긴장감도 생겼다.

부푼 마음을 안고 카메라를 빌리려고 한 대여점을 찾았더니 학생 신분으론 감당 못할 비싼 가격을 불렀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렸다간 더 야단 날테고. 그때 그는 싱겁게 꿈을 접었다.

그후론 연예계에 발을 디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양대 불문과 1년을 마친 후 입대하려고 마음을 다잡던 중 어머니 친구가 탤런트 입사 원서를 들고온 것이 연예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1991년 KBS 공채 탤런트로 입사한 그의 데뷔작은 드라마 '아스팔트 내고향' '공동경비구역 JSA' 를 빼고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심은하와 함께 주연을 맡았던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 와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이다.

자신감이 대단하다.

남들이 볼 때 좀 튀게 보이는 것도 거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까. "IQ가 155에요. 머리는 좋죠" 라는 그는 "IQ 그런거 사는데 별로 상관없어요" 란 말도 잊지 않는다.

털털한 성격이지만 꼼꼼한 구석이 있다.

촬영을 끝내고 세트를 다 치운 뒤에도 미련이 남아 촬영한 필름을 혼자 보고 또 보는 일은 예사다.

요즘엔 시간이 없어 운동을 잘 못하지만 수영.태권도.골프.배드민턴 등 자타가 인정하는 스포츠 맨이기도 하다.

글〓신용호, 사진〓오종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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