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나랏빚 걱정에 공약 이행 반대하는 일본 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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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한나라당이 오늘 의원총회를 열고 본격 토론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전도난망(前途難望)이다. 수정안이 나온 지도 한참 됐지만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내 의견조차 ‘국가 백년대계’냐 ‘국민과의 약속’이냐라는 나름의 논리에서 한 치 벗어날 생각이 없다. 절충론은 서기도 힘들다. 다음 달 초 국회 제출 일정을 잡고 있지만 한나라당의 당론 변경 여부조차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일정 운운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지경이다. 생각 같아선 차라리 원안 추진하고 공과는 후대에 맡기자고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훨씬 가능성이 큰 여러 후유증이 눈에 밟힌다.

지난해 정권교체의 비원(悲願)을 이룬 일본 민주당이 요즘 공약 이행을 둘러싸고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지난주 핵심 공약인 아동수당 지급과 관련해 ‘쓸데없는 예상 삭감분 중 여유 닿는 대로 하겠다’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바로 다음 날 ‘당연히 예정대로 전액 지급할 것’이라고 뒤집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여유 닿는 대로’란 발언이 ‘아동수당은 고맙지만 재원이 분명치 않으면 아이들에게 빚을 남기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는 시민의 의견을 받아서 나왔던 것이라니, 결론이 어떻게 나든 도대체 누가 나라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하다. 고속도로 무료화 공약을 두고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관련 예산이 대폭 줄어들면서 무료화 구간이 지방을 중심으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지만 민주당으로선 어쨌든 2012년 전국 무료화 공약 이행의 첫발은 뗀 셈이다. 그런데 국민 반응이 흥미롭다. 지난주 니혼게이자이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조치가 경제적 효과는 있다는 대답이 33%에 그친 반면 오히려 경제에 마이너스라는 대답이 38%에 이르렀다. 더욱이 예정대로 2012년에 전면 시행하는 것에 대해선 무려 62%가 반대했고 찬성은 18%에 그쳤다. 선진국 평균의 두 배에 이르는 나랏빚에 대한 걱정이 바탕에 깔렸을 게다. ‘매니페스토 선거’를 내건 민주당을 선택했지만 그 공약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는 일본의 민도(民度)에 정치가들이 머쓱해졌겠다 싶은 대목이다.

우리 지방선거가 석 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 민주당이 전국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서민과 지역발전을 앞세우겠다는 한나라당도 무슨 공약을 내걸지 모른다. 잘못된 공약이 나라를 어떤 분란지경에 빠뜨리는지 우리는 세종시를 통해 똑똑히 보고 있다. 지방선거라고 다를 게 없다. 정치 행태가 바뀌길 기대하지만 싹수 안 보이면 유권자 스스로 바뀌는 수밖에 없다.

박태욱 대기자

◆매니페스토=구체적인 예산과 추진 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을 일컫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후보들의 공약 남발을 막기 위해 2006년 지방선거 때 매니페스토 운동이 도입됐다. 공약의 구체성, 검증 가능성, 달성 가능성, 타당성, 기한 명시 등을 기준으로 공약을 분석·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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