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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해외 실명제’ 명분-현실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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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명분이냐, 현실이냐. 정책 당국이 자주 부딪히는 딜레마다. 해외 금융계좌를 낱낱이 들춰내 검은돈을 적발하겠다는 취지의 해외 금융계좌 신고제 또한 그런 딜레마에 빠졌다. 하지만 이번엔 명분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나 커 정부 내에서도 걱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외 금융실명제’로도 불리는 이 제도는 국회와 국세청, 기획재정부가 추진 중이다. 관련 법안은 이미 국회 기획재정위에 올라가 있다.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 등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국제조세조정법과 조세범처벌법 개정안이다. 두 법안은 해외 재산 은닉과 탈세를 막기 위해 해외금융계좌 신고를 의무화하고,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법안대로라면 국세청은 누가 얼마를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국세청은 이를 바탕으로 해외로 빼돌려진 검은돈에 대해 강력한 제재와 처벌을 가할 수 있다. 미신고자에 대해선 1억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는 것은 물론 계좌 잔액이 5억원을 초과할 경우 형사처벌까지 할 수 있다.

이런 제도를 두고 겉으론 모두 도입에 찬성한다. 명분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력한 제재를 갑자기 도입하는 데 대해선 걱정의 목소리가 크다. 해외계좌 신고제는 해외비자금을 밝히는 열쇠다. 국세청이 신고하지 않은 해외계좌를 조세정보 교환이나 기획 조사로 밝혀낼 경우 돈의 출처나 조성 경위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 국제화 추세에서 웬만한 기업들은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신고를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처벌하는 것은 신고를 강제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자칫 선의의 범죄자만 양산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반영하듯 정부 내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기획재정부는 현실을 감안해 신중론을, 국세청과 일부 의원은 명분 중심의 조기도입론을 펴고 있다.

특히 백용호 국세청장은 지난달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를 4월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8일 국회 업무보고에서도 백 청장은 도입 의지를 거듭 밝혔다. 반면 재정부는 충격을 완화함으로써 새 제도가 무리 없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신고를 유도하기 위해 세금을 모두 납부하면 형사 처벌을 면해 주는 한시적 사면령 시행을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부와 국세청은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을 개별 방문해 각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대국회 설득전에 나섰다. 재정부는 법안 발의권이 없는 국세청이 의원 발의 형식으로 법 개정을 추진해 자신을 따돌렸다고 의심할 정도다.

또 다른 재정부 관계자는 “관련 법안의 개정을 실제 추진할지는 좀 더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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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부 재미동포는 한국에 두고온 돈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미 국세청(IRS)의 경고 때문이다. IRS는 정한 자진신고 기간에 해외금융계좌를 보고한 뒤 세금을 내면 형사처벌을 면해주겠다고 했다. 일종의 ‘한시적 사면령’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빼먹은 금융소득세와 미신고에 따른 벌금을 합하면 무시 못할 금액이다. 모른 척 하자니 뒷일이 걱정이었다. IRS는 나중에 해외의 금융소득이 밝혀지면 미신고 금융자산의 50%까지 벌금을 추징하고, 형사소추까지 하겠다고 밝혔다.

해외금융계좌 신고제가 도입되면 한국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개정안에 따르면 신고 의무자는 해외에 일정 금액을 초과한 금융계좌를 보유한 거주자와 내국법인이다. 비영리법인과 공공기관·금융기관 등은 제외된다. 신고 사항은 금융회사명·국가·계좌번호 등이다. 기한 내 신고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신고한 경우에는 1억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게다가 계좌 잔액이 5억원을 초과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최고잔액의 20%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형 등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혜훈 의원은 “국제적으로는 불법 해외 반출 재산, 역외 탈루소득 등 역외과세정보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를 적발할 수 있는 수단인 신고의무제도가 없어 정보수집활동을 통해 비정기적 기획세무조사에 의존하고 있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국세청은 두 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법 해외재산 반출에 따른 위험을 크게 증가시켜 역외탈세행위를 사전 억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정부 안에서도 걱정이 많다.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는 성매매를 막고 여성 종사자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제정됐으나 성매매를 근절하기는커녕 풍선효과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성매매방지법에 이 법안을 비유했다. 해외계좌 신고제를 도입해 세금 탈루나 재산 해외 은닉을 막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개인과 기업의 과거 책임을 물을 경우 뜻밖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다.

준비도 덜 돼 있다. 국회가 법을 통과시키더라도 시행령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고해야 할 금액의 기준 ▶신고자의 범위 ▶신고에 의해 과거의 세금 탈루 사실이 드러날 경우의 대책 등이 정밀 검토돼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전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조세연구원 안종석 본부장은 “외국 기업이 국내에 투자해 기업을 설립한 경우에도 내국법인이 돼 동일한 규정을 적용받는다면 자금의 국제거래를 지나치게 제약할 수 있다”며 “다른 국가에서는 그런 규제를 하지 않는다면 외국인투자자가 우리나라에 투자하기를 주저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한 고객이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UBS의 ATM기를 통해 은행 거래를 하고 있다. UBS는 2008년 미국 부동산 재벌의 탈세를 유도했다 적발됐다. 미국 정부는 UBS를 상대로 포괄적 금융정보 수집권한(John Doe Summons)을 행사해 이 은행과 거래를 하는 미국인 250명의 계좌 정보를 확보했다. [블룸버그]

실효성 역시 의문이다. 미국의 경우 30년 넘게 해외계좌신고제를 운용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계좌의 30% 정도만 신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지난해 미 정부가 사면령을 앞세워 자진신고를 유도해 신고율을 10%포인트 정도 높인 결과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우리도 정상적인 세금만 내면 형사상 처벌을 면해주거나 가산세를 부과하지 않는 사면 조치를 당근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세금 탈루 등 불법 행위가 드러날 것을 뻔히 아는데 누가 신고하겠느냐는 것이다.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이를 찾아낼 수단이 부족하다. 아직까지는 조세정보교환협정을 체결한 나라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사모아 등 6개 조세피난처와 정보교환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스위스, 홍콩, 파나마, 케이맨군도, 리히텐슈타인, 지브롤터,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과도 협정 체결을 추진 중이다. 재정부는 이 같은 국제조세 인프라를 갖춘 뒤 해외계좌 신고제를 시행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다. 국세청은 그러나 “일단 시행하면서 인프라를 추가로 확충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한다.

국회 기획재정위는 22일 조세소위에서 두 법안의 처리 시기나 방법을 논의할 예정이다. ‘좋은 뜻’을 앞세운 국세청과 정치권의 조기 시행 의지는 강하다. 국세청 관계자는 “역외 탈세는 국부를 해외로 유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뿌리뽑아야 한다”며 “이번 국회에서 개정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논의를 본격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부는 각국의 제도를 비교하고 제도 시행에 따른 파장을 짚어보기 위해 용역을 의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실을 살펴가며 천천히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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