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미 노근리 사건 발표문<요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 1.조사경과 >

노근리사건 조사는 1999년 9월29일 AP통신이 보도함으로써 한·미 양국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50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관련된 모든 사실을 규명할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되었다.

< 2.한·미 조사내용 >

가. 사건 배경 및 전투 상황

-한국전쟁초기 미군들은 나이가 어렸고 훈련과 장비가 부족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통상 피난민 대열의 민간인 그룹으로 가장하여 방어선을 통과한후,후방에서 미군기지를 공격하는 침투가능성을 두려워하였다.

나. 피난민 통제

-전쟁초기 한국정부는 피난민 통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하지 못했다.그로인해 미군은 피난민 이동을 통제하는데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 임계리·주곡리 주민들의 집결 및 이동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1950년7월25일 하가리 근처에서 노숙할때 피난민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그러나 이에 연루된 미군이 누구였는지,피난민 통제정책을 위반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라. 공중 공격

▶ 다수의 한국측 증언자들은 50년7월26일 정오경 미군 항공기가 피난민들에게 기총공격 또는 폭격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 제5공군 항공작전 일일요약보고서에 따르면,7월26일 영동지역에 3회의 출격기록이 확인되고 있는데,이에 대한 출격임무 결과보고서는 찾을수 없었다.

-50년7월27일 아침 일찍 노근리 주변의 미 제7기병연대 제1대대 지역에 실제로 공중공격이 있었다.

-따라서,노근리 주변지역에서 7월26일 공중공격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 50년 7월25일자 미 제5공군 전방 지휘소 터너 C.로저스대령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북한군에 의해 조작되거나 북한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진지로 침투한다는 내용이 보고되었음.육군은 미군 진지로 접근하고 있는 모든 민간 피난민들을 항공기로 기총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음.현재까지 공군은 육군의 이러한 요청에 응해왔음.”그러나 미 공군 조종사 출신의 증언자들은 그러한 지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마. 지상사격 및 사격명령 여부

▶ 미 지상군은 노근리 사건 발생 기간동안 노근리 주변에서 피난민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

-50년 7월26일과 29일 사이에 일부 미군은 쌍굴 내부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 있는 피난민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미군들은 피난민이 있던 곳으로부터 소화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사격을 했다.그 결과 수 미상의 피난민이 죽거나 부상을 입게 되었다.

-2000년 7월 한국측 조사반은 쌍굴 및 수로 벽체에서 다수의 미제 탄자 및 탄흔(彈痕)을 발견하였다.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사건현장에 있던 피난민중 17명이 미군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

▶ 증언한 모든 참전장병들은 사격명령 없이 사격을 했다고 증언하였다.그러나,일부 증언자들은 명령이 반드시 하달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증언하였다.

▶ 50년 7월24일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의 전문일지에는 피난민의 전선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사격지침등 연대 연락장교의 전문이 포함되어 있다.그러나 사격명령에 관한 증언자들의 증언 불일치로 인하여 사격명령 하달여부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바. 사상자 수

한국측 증언자들과 미 참전장병들의 증언 사이에는 사망자나,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에 대해 상당한 차이가 있다.한국 피해자들은 확인된 숫자는 아니지만,사망,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을 248명이라고 영동군청에 신고하였으나 미 참전장병들은 이보다 적은 인원수를 증언하고 있다.

< 3.조사 결론 >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 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 중이던 미군은 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난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