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대표팀에 보약 된 ‘엘리제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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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동아시아축구선수권 한국-중국전이 열린 2월 10일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경기장. 중국에 1978년 이후 단 1패도 없었던 한국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0-3 스코어가 선명히 찍힌 전광판에는 싸늘한 비가 추적추적 흘러 내렸다. 패장 허정무 감독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눈물이었고, 중국에게는 공한증(恐韓症)에서 벗어난 단비였다.

비통한 심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허 감독을 향해 중국 기자들은 “오늘 패배로 아시아 축구 판도는 바뀌었다. 한국이 공중증(恐中症)을 앓게 될 것”이라며 속을 긁었다. 하지만 허 감독은 차분했다. 그는 “중국의 대승을 인정한다. 우리가 실수했지만 두렵지 않다”며 “오늘 패배를 꼭 보약으로 삼겠다”고 말한 뒤 경기장을 떠났다.

경기 후 몇몇 기자와 함께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고 선술집에 둘러앉았다.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자주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크게 진 다음에는 그때마다 “승리한 다음 날 감독이 할 일은 별로 없다. 승리감 때문에 선수들은 의욕이 넘친다. 정말 감독이 필요할 때는 패배한 다음 날이다. 감독의 판단과 노하우가 팀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새 허 감독의 위기관리 능력이 우리들의 술안주에 올라 있었다.

취재진들이 새벽녘까지 술로 패배감을 씻던 그 시간 허 감독은 뭘 하고 있었을까. 그는 대표팀 숙소에서 비상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중국에 당한 참패의 충격을 딛고 나흘 뒤 열리는 일본과의 경기에 대비해야 했다. 분위기 쇄신이 필요했다.

선수들의 정신 재무장을 위해 ‘애국가 4절까지 제창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허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애국심만 강조해서는 젊은 선수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허 감독은 “이런 마음으로 훈련해서 효과가 있겠나? 우선 선수들 마음을 풀어주는 게 급하다”면서 다음 날 오전에 예정된 훈련을 취소했다.

밤잠을 설친 허 감독은 아침식사를 마친 뒤 잠시 선수들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패배에 신경쓰지 말자. 흔들림 없이 내가 생각한 길을 가겠다. 위축되지 말고 평소처럼 준비하자”고 주문했다. 그러곤 갑자기 장비를 담당하던 김호성씨를 불러 식당 한족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켰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김씨는 연주를 시작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허 감독은 “눈을 감고 이 곡을 들으면서 어제 일은 모두 잊자”고 당부했다.

김씨의 피아노 연주 모습을 숙소에서 우연히 본 허 감독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꺼낸 회심의 카드였다. 선수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아노 선율을 감상하며 차분히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곤 설날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 기분 좋게 3-1로 승리했다. 허 감독은 승부욕만 강조하던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일전에서 이긴 다음 애국가 제창을 제안했던 한 스태프는 이렇게 농담했다.

“애국가 4절까지 부르게 했으면 4골이 났을 텐데 3골밖에 못 넣었네.”

최원창 기자 gerrard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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