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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범, 삼겹살 파티에 닭가슴살 싸가는 ‘독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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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03면

거침없는 자기 표현. 모태범은 남자 500m에서 우승한 뒤 관중석에서 날아온 모자를 쓰고 춤을 췄다. 대형 태극기를 들고 빙판을 누비는 일은 승리한 선수의 특권이다. 모태범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밴쿠버=연합뉴스]

모태범(21·한국체대)은 덩실덩실 춤을 췄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였다. 그는 관중석에서 팬이 던져준 수박 모양의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대형 태극기를 망토처럼 어깨에 휘감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익살맞게 춤을 췄다. 한국이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역사적인 순간은 그렇게 유쾌하게 지나갔다.

밴쿠버의 ‘대한민국 쾌속 세대’ DNA가 다르다

21세기의 올림픽 풍경은 이전과 크게 다르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새긴 선수들은 관중을 향해, 중계 카메라를 향해 ‘나’를 홍보한다. 모태범은 스피드 스케이팅 1000m 시상대에 올라 손가락으로 위풍당당한 브이(V) 자를 그려 보였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이용대(22·삼성전기)는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그들은 ‘나’를 위해 뛴다. 그리고 ‘내’가 땀 흘린 결과물로 대한민국을 빛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그들이기에, 나란히 금·은·동을 딸 수 있는데 경쟁이 지나쳐 은·동메달을 놓쳤다는 비판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선수끼리라고 해서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등이 2위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일은 2등이 선두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일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으니까.

김연아가 20일(한국시간) 밴쿠버에 도착했다. 여유와 위트가 넘치는 그는 외국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연합뉴스]

메달을 따낸 선수들의 자기 표현은 적극적이고, 밝다. 이전 세대들이 태극마크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가 금메달을 따내는 순간 서럽게 울었던 것과는 다르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 고개 숙이던 건 이제 옛날이야기다. 메달리스트들은 취재진에게 “은메달도 따기 어려운 거예요”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런데 ‘나’를 앞세운 그들의 몸짓에서 이전보다 더 큰 에너지가 느껴진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유전자(DNA)가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자신만만 그들, 선진국 스포츠 접수
밴쿠버 올림픽에 참가한 쇼트트랙 대표 곽윤기(21·연세대)는 독특한 머리 모양으로 먼저 주목 받았다. 그는 올림픽 개막 직전에 열린 미디어 데이 때 펑크족을 연상케 하는 머리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왼쪽 머리는 밀어버리고 오른쪽 머리는 길게 길러 파마를 한 모양이다. 왜 그런 머리를 했는지 묻자 곽윤기는 특유의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튀려고요”라고 답했다.

모태범은 500m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서 취재진에게 “그동안 무관심이 서러웠다”고 귀여운 ‘항의’를 했다. 그의 금메달 소감은 “미디어 데이 때 저한테는 질문 한 개도 안 했죠?”라는 항변이었다. 500m 금메달과 1000m 은메달을 딴 후에 그는 “서울에 가면 곧바로 이승훈(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m 은메달)과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과연 자신이 정말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까 시험해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오랜 기간 국제종합대회에서 대표선수단을 뒷바라지했던 대한체육회 공보실의 김태형 차장은 “모태범이 금메달을 따고 춤추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봤다. 아마도 옛날에 금메달 따고 그렇게 했으면 선배들이 ‘메달 따더니 건방져졌다’며 눈치를 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어디 있나”라면서 “선배들 옆에만 있어도 눈치를 보던 예전 선수들과 지금의 신세대는 완전히 다르다. 요즘 어린 선수들이 자유분방해 보일지 몰라도 자기 몸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철저하다”고 말했다.

이상화 170㎏ 바벨로 철벅지 완성
모태범은 밴쿠버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있었던 대표 팀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마다하고 직접 싸간 닭가슴살을 꺼내 먹었다. 주변에서 “독한 놈”이라는 탄성이 터졌다고 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리스트 이상화(21·한국체대)는 지독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4년 전 토리노 겨울올림픽 때 5위에 그쳤던 게 두고두고 아쉬워서 ‘체격부터 키워야겠다’고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이상화는 경쟁 국가의 여자 선수들보다 20㎏ 정도 무거운 170㎏의 역기를 들고 스쿼트(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하며 하체를 단련하는 운동)를 했다. 훈련 결과 얻은 것은 둘레 22인치의 굵은 허벅지였다. 팬들은 이상화의 허벅지를 두고 ‘금벅지’ ‘꿀벅지’라고 불렀다. 이상화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게 불러주니 감사하다”며 크게 웃었다.

과거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릉선수촌의 ‘개구멍’을 찾아 한밤 탈출을 감행한 뒤 술을 마셨다거나 하는 무용담은 이제 옛날이야기다. 요즘 대표 선수들은 스스로 먹는 것까지 관리한다. 선수들과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할 때면 “커피나 탄산음료는 마시지 않는다”며 물이나 주스를 시키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팀이 밴쿠버에서 연일 눈부신 성적을 내자 외신들은 그 비결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를 내놓았다. 로이터통신은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성공에는 별다른 비결이 없다. 고된 훈련이 보상 받은 것”이라고 한마디로 분석했다.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팀은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혹독한 체력훈련을 거듭했다. 이승훈과 모태범, 이상화가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마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는 뒷심이 돋보였다. 이들은 “강력한 하체 강화 훈련과 체력 훈련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팀의 지도자들이 밴쿠버 올림픽이 개막하기 전부터 “이번 대회에서 스피드 스케이팅의 새 역사를 쓰겠다”고 은근히 자신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선배와 후배, 지도자와 선수 간에 강압적인 분위기가 없는데도 선수들이 이처럼 극한의 훈련을 소화해낸 것은 선수 개개인의 동기 부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옥 훈련’을 받아들였다.

“나 알아보나 길에 나가보겠다”
변한 건 선수들만이 아니다. 한국의 메달 소식이 들려오는 종목도 바뀌었다.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 때만 해도 쇼트트랙 외에는 어떤 종목이 있는지도 잘 몰랐던 스포츠 팬들이 이제는 여러 경기장의 소식을 접하느라 바쁘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 소식이 들려오고,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20·고려대)는 이 종목에서 한국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낼 만한 유력한 후보다.

김연아는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유창한 영어로 현장 인터뷰에 응했다. 여유 넘치는 표정과 매너에 팬들은 “역시 여왕 김연아”라며 흥분했다.

한국이 ‘선진국형 종목’을 정복하고 있고, 그것을 이뤄낸 선수들의 모습이 당당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은 스포츠 외적인 짜릿함을 주고 있다.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고, 스포츠 과학에서도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역시 스포츠에서 국력은 가장 큰 경쟁력이다.

밴쿠버에서 한국이 새 역사를 쓰는 데는 스포츠 과학이 뒷받침됐다. 모태범과 이상화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남녀 500m를 휩쓸었다. 500m는 스피드 스케이팅 중 최단거리 종목으로, 육상 100m와 같은 상징성이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팀은 과학적인 훈련을 접목시켰다. 대표적인 게 쇼트트랙 훈련이다. 스피드 스케이팅을 하면서 쇼트트랙의 장점인 코너링 기술을 흡수하는 특별 훈련을 했다.

달라진 팬, 노 메달 이규혁에 박수
모태범과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낸 후 연일 발랄한 인터뷰를 쏟아내자 네티즌들도 신이 났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들에게 별명 붙이기 붐이 일어났다. 모태범은 ‘모터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강력 모터를 장착한 듯한 그의 스피드를 칭찬하는 재치 만점의 별명이다. ‘모태(못해)범이 아니라 잘해범’, 육상 스타 우사인 볼트(자메이카)를 빗댄 ‘모사인 볼트’도 있다. 이상화는 ‘금벅지’와 ‘꿀벅지’를 넘어 ‘철벅지’라는 별명을 얻는가 하면, 경기 도중 드러난 누런 굳은살투성이의 맨발이 화제가 되면서 ‘황금발’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모태범과 이상화는 “뜨거운 관심이 재미있고 신기하다”며 싱글벙글이다.

이제 올림픽 무대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다. 금메달리스트만큼이나 ‘위대한 도전자’들이 박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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