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 갈망하는 일본인들에게 대리만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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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22면

‘체인지(CHANGE)’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정치 드라마가 흔치 않은 일본이지만 ‘체인지’는 걸출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재미있고 신선하다는 평이다. 이 드라마는 기무라 다쿠야가 주연했다. 기무라는 일본에서 흥행 보증수표다. 그가 출연한 ‘히어로’ ‘뷰티풀 라이프’ ‘굿 럭’ 등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인기그룹 스마프 멤버인 그는 국내에서도 ‘김탁구’라 불리며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 드라마 ‘체인지’

극중에서 기무라는 주인공 아사쿠라 게이타 총리역을 맡았다. 그의 대중적 인기와 탁월한 연기가 '체인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하지만 ‘체인지’란 드라마가 괜찮은 정치 드라마로 인정받는 것은 일본 정치의 현실이 사실적으로 녹아있고 주인공을 통해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2008년 5월부터 후지TV에서 10부작으로 방영됐다. 높은 시청률(평균 22.1%)을 보였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정치와 거리가 먼 초등학교 교사 아사쿠라가 갑작스럽게 숨진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중의원이 된 후 우여곡절 끝에 총리 자리에 올라 벌이는 이야기가 축이다. 드라마의 줄거리만 보면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35세 초선 의원이 일본 총리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추구하는 정치에 사욕이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인지’ 속 이야기 하나하나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곱슬머리 교사 아사쿠라가 미야마 리카(후카쓰 에리)의 설득으로 우여곡절 끝에 중의원에 출마하게 되거나 실세 정치인의 계산 때문에 총리 선거에 나서지만 총리가 되고 난 후 진화하는 아사쿠라의 모습이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

특히 들고양이 수십 마리를 돌보다 이웃들로부터 ‘시끄러우니 다른 데로 이사 가라’는 독촉을 받는 한 중년 남자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대목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당시 아사쿠라는 거물급 정치인과 약속이 있었지만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느라 제시간을 놓치고 만다.

조희정 숭실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드라마 속 아사쿠라 총리는 아주 원칙적인 정치의 모습을 보여줬다. 제스처만으로 유권자를 생각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모습이 아사쿠라 총리였다. 그런 정치인이 현실에선 비현실적일 수 있으나 일본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치인 아사쿠라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이 드라마는 정치는 국민 주권 문제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만큼 국민들이 다 아는 내용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으며 정치의 자리를 다시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석씨도 “‘체인지’는 일본인들의 새로운 정치 스타일에 대한 갈망을 해소해줌으로써 인기를 끌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체인지’가 정치 드라마로 미덕을 가진 또 다른 이유는 절제된 사랑 이야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시티홀’이란 드라마가 방송됐다. 흔치 않게 정치를 소재로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국회의원 조국(차승원)과 인주 시장이 되는 신미래(김선아)의 러브 스토리가 너무 많아 엄격하게 정치 드라마로 분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반면 ‘체인지’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는 아사쿠라와 미야마의 감정이 절제돼 나타난다. 일상 속에서 묻어나는 교감은 보여주면서도 두 사람의 본격적인 연애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시청자들이 멜로 드라마 못지않게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색다른 사랑 얘기를 즐길 수 있게 한 것, 그게 ‘체인지’의 힘이다.

‘체인지’는 실제 일본 정치현실과도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방송될 당시 극중 아사쿠라 총리는 현실의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비교되기도 했다. 자제와 신중함으로 대변되는 후쿠다 총리와 솔직함과 파격을 보이는 아사쿠라 총리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뤘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 실망한 일본인들에게 아사쿠라 총리는 신선함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 해 일본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54년간 이어져온 자민당 일당 독주를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이변을 이뤄냈다. ‘체인지’가 일본인의 사랑을 받은 이면에는 유권자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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