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안기부 리스트' 공개된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9일 아침 본지에 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후보들에게 건네졌던 안기부의 '자금리스트' 가 단독 보도된 뒤 여야의 대치상황은 험악해졌다.

한나라당은 '명단 공개가 정략적 유출' 이라고 의심했고, 민주당은 '횡령한 공금의 국고환수' 를 강조했다.

여야 정당과 청와대.검찰 기자실도 시끌벅적했다.

'벼랑끝 정국' 현장은 리스트 파문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트를 먼저 취재한 본지 특별취재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이를 입수하지 못한 다른 일부 언론에서 "의도적 명단유출에 언론이 말려들었다" 는 주장을 폈다.

지난주부터 검찰주변에선 리스트를 추적하려는 언론사간 뜨거운 취재경쟁이 벌어졌고 본지 취재팀은 이를 앞서 취재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에서 왜 이런 시각으로 바라 보는 것일까. "낙종(落種)하면 엉뚱한 화풀이를 하는 게 언론사의 그늘진 생리 아니냐" 는 정치권 주변 인사들의 비아냥이 맞는 것일까. 본지 취재팀은 취재 후 보도까지 심각한 고민을 했다.

그것은 사건에 섞인 미묘한 요소와 파괴력 때문이었다.

안기부 자금은 국민이 낸 세금을 도용한 것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일탈과 오욕(汚辱)의 모습이다.

반면 의원 이적(移籍)파문과 어울려 야당 탄압논란과 연결돼 있다.

'DJ비자금' 수사는 왜 하지 않느냐는 형평성 측면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취재팀은 이를 보도해 국민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해도 이번 사건이 '공정한 선거문화, 깨끗한 정치자금 조달' 로 가는 '사회적 진통' 이 돼야 한다는 확신에서였다.

민의 알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 는 믿음에서였다.

당장 리스트 보도를 통해 집권층과 정보기관의 '검은 돈관계' 를 실감시켰다.

당시 신한국당 지도부에 있던 이한동 총리와 김윤환 민국당 대표가 리스트에 빠진 것은 새로운 의문을 국민에게 제기했다.

이런 '보도효과' 를 전하면서 모 대학 언론학 교수의 반응을 들었다.

익명을 부탁한 그는 "특종을 했어도, 기사를 놓쳤다 해도 사안의 본질에 충실하는 게 기자정신" 이라고 말했다.

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