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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당정협의 없는 보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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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정욱 정치부 기자

국회 안에 있는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실은 언제나 공무원들로 북적인다. 당과 정부 간 정책협의가 수시로 열리기 때문이다. 준비 중인 법안을 놓고 해당 분야의 당.정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댄다. 합일점을 찾아내고 언론에 발표도 한다. 합의에 이르진 못했지만 여당이 추진 중인 사립학교법 개정안도 이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최근 여당이 국민적 논란 속에 새 법안을 추진하면서도 관계부처와 공식 협의를 일절 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그래서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법 집행기관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여당의 입장을 들어야 했다. 예컨대 이들은 보안법 사범의 90% 이상이 적용된 찬양.고무죄를 없앨 경우 수사활동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여당에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여당 관계자에 따르면 보안법 개폐에 대해서도 "법무부 등과 공식적인 당.정 협의를 하자"는 고위 정책관계자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쪽 입장이야 뻔한 것 아니냐"는 다수 의견에 묻혔다고 한다. "비공식적으로 보내온 법무부의 의견서를 보니 우리의 입장과 너무 달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만나봤자 당.정 간에 불협화음만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형법 개정안을 통해서도 우리나라의 안보태세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수긍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이 만들어지면 이를 집행할 정부기관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지 않은 열린우리당의 처사는 떳떳지 않다. 불협화음을 걱정했다지만 정부의 우려조차 불식하지 못하면서 국민의 불안은 어떻게 설득하려 하는가. 상당수 국민은 보안법 폐지안 자체보다 '우리만 옳다'는 식의 독선적 자세를 더 경계한다. 정부기관과 공식 협의를 생략한 게 이런 열린우리당의 자세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보안법 개폐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대화와 논쟁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찾을 수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반대논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부패방지위는 지난달 부패방지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94개에 이르는 국가기관에 의견을 물었다. 열린우리당이 지금이라도 그런 절차를 밟았으면 한다.

김정욱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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