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권의 '위기'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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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의 우리 정치권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이한 정치파행을 연출하면서 '정치위기' 모델의 전형(典型)을 새롭게 만들려고 기를 쓰는 것 같다.

주요 일간지는 사설을 통해 연일 정치권의 '이성(理性)' 실종을 지적하고 있다.

****국민 정서.여론 반영 못해

이들 언론이 국민적 정서와 여론을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한다고 본다면 분명 한국 정치현실은 '위기' 단계로 접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본체인 정치권 지도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고 있으니 불안을 넘어서 해괴할 따름이다.

우리의 정치권을 구성하는 인사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우월한' 재능과 자산 때문에 국민의 대표가 됐고 지금의 자리를 향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공적 개념과 정의(正義)로 합리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보니 아집과 오만으로 가슴과 머리가 채워진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당장의 문제는 현실의 위기수준과 정치권의 인식수준과의 엄청난 괴리인 것이다.

연말연시를 기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경제관계 실정(失政)과 민심이반에 대한 '반성' 의 태도 표명과 최근 야당 총재의 '초당적 협력' 을 향한 '상생' 지향적 이미지 개진은 며칠도 못가 다시 정치권 전체와 국민간의 불신과 혐오관계로 대치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과 원칙' 그리고 정도(正道)라는 좋은 말도 오히려 3金1李의 '표독한 세(勢)싸움' 이라는 신조어에 가려 빛을 잃고 있다.

오래 전인 1862년 프로이센에서 "독일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고 하면서 재상으로 취임해 철혈(鐵血)로 통일 독일의 '제2제국' 을 건설한 비스마르크 조차도 사회주의운동 확산에 따른 내치(帝政)위기에 임해서는 정치적 이성과 설득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써서 난국 타개를 시도했었다.

하물며 2000년대의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과연 우리의 정치권은 어떠한 수준인가.

정치권의 이성이라는 것은 높은 수준의 현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 선의 유지를 말한다.

민주주의와 국리민복을 거론하면서, 민주시민이 뽑은 대통령과 야당 총수 사이가, 그리고 여야관계가 어떻게 사생결단의 적(敵)일 수가 있는가.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을 못하고 사리와 당리, 그리고 권력욕만을 좇으려 할 때 우리는 이를 '비이성적' 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국민들은 국가위기의 전조라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이 현 상황을 두고 '경제적 난국' 정도지 무슨 '국가위기' 수준이냐고 항변하면서 과거에도 우리 정치현실의 파행 경험을 거듭해 왔다고 자위하고 있으니 이 또한 보통문제가 아니다.

현대적 의미의 '국가위기' 란 외부로부터의 침략.점령이나 쿠데타 등을 통한 체제 전복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정치권 파행과 혼란은 국가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정치적 권위를 붕괴시키고, 사회질서와 경제관계의 틀을 유지시켜주는 규범과 가치체계를 흔들어 놓는다.

이때 개개인은 공동체적 가치와 공공선 보다는 개인적 자기 생존투쟁에 매달리게 되며 국가의 공권력 또한 지휘체계와 행동기준을 잃어 무정부상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섬뜩한 상황은 권위주의 체제아래서 보다 오히려 '유사 민주주의' 체제아래서 발생 가능함을 세계 현대사는 많은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상식' 선에서 해법 찾아야

설령 현 정치상황이 '국가위기' 수준은 아닐 수 있더라도 정치권이 국가위기의 개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큰 문제다.

여권이 DJP 공조복원과 사정을 통한 정치권 재편(정계개편)을 현실 타개방법으로 믿고 있다거나 혹은 경제사정 호전으로 만사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면서 야당을 제압해 정치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면 이는 국가위기로 치닫는 길이다.

한편 야당 또한 사생결단의 자세로 '적의 타도' 를 외치면서 거리로 나서고 '자해적' 이 된다면 이 또한 위기를 북돋우는 길이다.

이제 여야 지도부들은 뜨겁고 진실된 가슴을 갖고 오직 국민과의 '스킨십' 을 통해 정치권의 '신뢰' 를 쌓는 길밖에 달리 별 대안이 없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김동성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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