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윤동구씨 경주 설치미술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 부드러운 막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반짝이는 빛의 향연은 사랑과 생식에 대한 은유다.

검푸른 경주 하늘 위에 붉은 깃발을 올린 돛단배 한 척이 떴다. 경주시 신평동 370번지 아트선재미술관은 바다 위로 두둥실 나아간다. 기우듬히 허리 굽은 소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함께 떠나간다. 아니다. 배가 아니라 사막 위 천막이다. 중성적인 콘크리트 건물인 미술관을 감싼 빨강.초록.하양 막이 고분의 도시 경주에 다시 사람들을 위한 무덤을 세웠다. 보이지 않던 미술관이 막(膜)을 둘러치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막은 생물체의 기관을 싼 얇은 꺼풀처럼 보인다. 옛 도읍 경주가 한반도의 해묵은 거죽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한민족 생명의 바다요 사막이며, 피부이자 무덤이 미술관을 땅 위에 들어올린다. 막이 있기에 보인다.

설치미술가 윤동구(52.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씨가 8월 21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아트선재미술관 프로젝트'는 한 채의 집을 새로 짓는 건축적 규모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다.

그는 우람한 미술관을 가볍게 포장해 사라지게 한 뒤 그 통로로 들어선 관람객을 낯선 곳으로 이끈다. 오래된 과거의 도시 경주, 죽은 영혼이 머무는 무덤의 도시 경주로 사람들을 초대한 작가는 죽음과 시간, 생명과 시간의 문제를 우렁찬 동력기를 돌려가며 이야기한다.

윤씨가 끌어들인 소재는 추억의 정미소다. 쌀을 찧던 방앗간은 사라졌다. 한민족의 목숨을 책임지던 쌀을 만들던 터는 이제 없다. 작가는 움직임을 멈춘 방앗간 기계를 뜯어다가 다시 돌린다. 피대를 맞물리며 너른 미술관에 흩어져있는 생명의 기계를 덜컹덜컹 돌리는 반복적 운동은 음과 양, 여과 남, 암컷과 수컷의 생명운동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미술관을 채운 형체들은 대칭형이다. 부서지는 빛의 입자가 반짝반짝 헤엄치는 직사각형 막 건너편에 텅 빈 조용한 방이 있다. 둥근 몸을 제치며 돌아가는 원형의 굴레 앞에는 그를 맞아주는 막대가 돌아간다. 작가가 바람 소리와 고속도로에서 나는 소음과 찌르레기 울음을 녹음해 합성했다는 음향이 생성의 에너지로 기운찬 전시장 전체를 잔잔하게 울린다. 실크로드를 다녀온 뒤 남긴 작가의 말은 이 소리가 온 곳을 짐작하게 만든다. "시공의 흔적들이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뜨거운 사막의 바람처럼 불어대고, 그것들이 내 머리 속에서 매미의 울음소리처럼 공명되어 나간다."

윤동구씨는 고향이 사라진 현대인에게 우리가 온 곳을 몸으로 느끼도록 데려가는 무당이자 유목민의 전사다. 지금 경주 아트선재미술관에 발을 내디딘 이들은 먼 바다, 아득한 사막, 우주의 시원(始原)에 들어선듯한 오묘한 떨림과 만날 수 있다. 흐릿하며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의 장치, 막이 그 비밀의 문이다. 2005년 2월 6일까지. 054-745-7075.

경주=정재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