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버지 '순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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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리콴유(李光耀)전 싱가포르 총리는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를 만들어 냈다" 는 찬사와 더불어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로 불린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 중 가장 생생한 일' 로 꼽은 것은 네살 때 아버지가 가한 극심한 고통이었다.

부친은 애지중지하던 옷감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어린 리콴유를 우물가로 끌고 가 두 귀만 붙잡은 채 번쩍 들어올리는 벌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내 귀가 찢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는지 신기하다' 고 75세의 노인(자서전 출간 당시)은 몸서리를 치고 있다.

도박에 빠지고 부인에게 손찌검도 마다 않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용기와 희생심을 겸비한 여인이었다고 그는 묘사했다.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는 집안의 중요한 일을 나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결단력을 키울 수 있었다" 고 리콴유는 회고했다.

흔히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단(一端)이 李전총리에게서도 엿보인다. 부친을 배척하고 모친에게 이끌리는 아들의 복합적인 심리다.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부친 살해(parricide)는 사실 오이디푸스보다는 제우스신이 '원조' 격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기 부친인 우라노스를 죽이고 최고신이 된다.

똑같은 운명에 처할까 봐 태어난 자식들을 모두 먹어치우지만 제우스만은 할머니(가이아)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최고신에 오른다. 현대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부친 살해는 새로운 어젠다(의제)나 한발 앞선 시대정신으로 민의를 반영하고 민심을 얻어 구세력을 극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정초에 이인제(李仁濟)민주당 최고위원의 '아버지 순례' 가 화제에 올랐다.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각각 '건국의 부(父)' '근대화의 부' 라고 칭송하고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을 찾아가서는 혼자만 넙죽 큰절을 했다는 것이다.

미풍양속이라기엔 속내가 너무 훤히 비쳐보인다.

'소학(小學)' 에는 사람의 세가지 불행(三不幸)으로 너무 일찍 과거급제하는 것, 부형(父兄)의 세력에 의존해 높은 벼슬을 하는 것, 재능과 문장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을 꼽는 구절이 나온다.

차세대 지도자라면 기성의 권위에 기대기 보다 자력으로 새 시대를 열려는 기상이 넘쳐야 마땅하다.

노재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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