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선 구조조정 후 경기부양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김대중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작금의 어려운 현실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또다시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만큼 국민 경제는 심각하며 국민의 불안감은 매우 고조돼 있고 민심은 돌아서 있다.

올해의 화두는 단연 경제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이 국가 지도자들의 제일의 과제이긴 하지만 특히 올해는 자칫하면 나라 경제가 회복 불능의 나락으로 추락할 갈림길에 서 있는 형국이라 더욱 그렇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강력한 개혁 완수 의지를 환영한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 부양을 언급할 때가 아니다. 대통령이 약속한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시한은 지난해 말로 지났다. 우리가 보기엔 금융.기업 개혁은 이제 비로소 발동이 걸린 셈이다.

부실 기업 퇴출 발표로 50개사 정도가 그런대로 정리됐지만 아직도 당시 회생 가능으로 판정난 기업들 중 상당수가 사실상 정부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금융 구조조정의 가시적인 성과로 꼽고 있는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향후 6개월간 협상이 진행되면서 어떻게 결말날지 모를 상황이며 부실 은행들을 끌어다 모은 금융지주회사도 1분기 중 출범할 예정인데다 노조의 반발로 기능별 재편이 내년으로 미뤄진 상황이다.

2월 말까지로 예정된 공공.노동부문 개혁도 순조롭지 않을 것 같다.

구조조정이 이처럼 지지부진한데도 정부는 벌써 경기부양책을 들먹거리고 있다. 제한적 부양이나 구조조정.경기 부양 병행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나친 감이 있다.

올해 세출예산의 70% 정도를 상반기 중 조기 집행할 계획이고, 특히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실업대책 등 경기와 직결되는 예산 40조원의 80%를 상반기 중 쓰기로 했다.

새로 조성되는 공적자금 40조원이 상반기 중에 대부분 투입될 것이고 연기금 중 3조원이 증시로 유입된다.

또 산업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이 내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중 약 3분의1에 해당하는 20조원의 투기적 등급 회사채 대부분을 인수하거나 보증하는 방안도 곧 시행된다.

이렇게 많은 돈이 투입되면 하반기 중 경기가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는 구조조정이 잘 돼서가 아니라 막대한 돈 때문일 것이다. 2년여 전 64조원의 공적자금이 조성.투입되면서 경기가 살아났던 전례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경기부양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정부가 앞장서 떠들 때는 아니다. 작금의 경제상황과 정부 신뢰 국면에서 경기 부양이란 구조조정을 늦추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 다시 경제위기가 닥칠 경우 정말 회복 불능의 상황에 빠질 것이다. 지금은 정부가 경기 부양을 외치기보다 철저한 구조조정과 정부 신뢰를 되찾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