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신뢰하게 하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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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린든 존슨은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베리 골드워터 후보에게 압승을 거뒀다. 일반투표에서 61%를 얻고, 선거인단 5백38명 중 4백86명을 차지했다.

4년 후의 대선에서도 재선이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존슨은 의회에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에 관한 역사적인 법안들을 많이 통과시켜 흑인들에게는 '민권의 아버지' 로 통했다.

그런 존슨이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신뢰의 위기(credibility gap)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계승한 존슨의 전쟁확대 과정이 투명하지 않아 국민들은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신뢰는 리더십의 기본이다. 지도자가 신뢰를 잃으면 그가 제시하는 비전은 환상이나 신기루 같이 보인다. 그가 추진하는 정책은 지지받지 못한다.

우리는 새해 경제를 걱정한다. 경제에 대한 걱정은 공포(Panic)로 확대재생산된다.

경제가 흔들리면 돈으로 평화를 사는 구도의 대북 햇볕정책도 걱정된다.

북한에 계속 '퍼줄' 형편이 안되고 부시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까지 강경으로 돌아서면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의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문제의 뿌리는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신뢰의 위기다.

많은 한국인들이 金대통령과 정부.여당이 하는 일을 불신하는 데서 핵심이 되는 문제들이 파생한다.

옷로비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법원도 검찰의 결론을 뒤집는 판결을 했다. 민주당 의원 세사람이 자민련으로 훌쩍 떠난 사건도 여당의 '꼼수' 로 비친다. 별로 축적해둔 신뢰가 없는 여당에는 무거운 짐이다.

그 뒤에 잇따라 터진 권력형으로 보이는 여러 비리에 대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처음부터 누군가 봐줄 사람이 있으면 봐주기 수사가 될 것이라고 속단해버린다. 이러니 법과 질서가 바로잡힐 리 없다.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金대통령은 열심히 북한이 변했다, 북한은 미군의 계속주둔을 받아들였다, 북한은 그들의 일방적인 통일방안인 연방제를 포기했다고 설명하는데도 그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金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신뢰의 수준이 이 정도로 낮으면 앞으로 경제가 조금만 더 나빠지면 선공후득(先供後得)의 대북정책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金대통령과 정부.여당에는 신뢰의 회복이 새해의 최우선 과제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권력은 정치의 수단이요, 목표다.

金대통령과 민주당이 2002년 권력재창출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잡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통해 한국이 직면한 당면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지는 근본적으로 신뢰에서 나온다. 金대통령 정부에 대한 신뢰는 위험수준 이상으로 보인다.

정부가 자신의 신뢰도를 후하게 매긴다고 해도 위기라는 데는 동의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의 종말' 의 저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Trust)' 라는 두번째 저서에서 한국을 중국과 함께 신뢰의 수준이 낮은 나라로 분류했다.

한국 문화가 가족지향적이어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영어의 트러스트는 크레디빌리티(Credibility〓신뢰성)의 바탕 개념이다. 전자가 약하면 후자도 약할 수밖에 없다.

후쿠야마의 분석이 옳다면 한국 사회는 문화적으로 신뢰의 하부구조가 약하다.

그러나 金대통령과 정부가 겪고 있는 신뢰의 위기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대북정책이 더 투명하고, 검찰 수사가 공정하고, 의원 꿔주기 같은 마키아벨리적 꼼수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어려움이다.

金대통령의 최근의 발언들을 보면 그도 위기의 본질을 아는 것 같다.

올해는 주요 정책의 입안과 수행에 앞서,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탐하기에 앞서 지금까지보다 훨씬 적극적.지속적으로 신뢰회복의 조건만들기에 힘을 쏟아야겠다. 국민의 입장에서도 정부를 불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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