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애국이 애족보다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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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애국(愛國)과 애족(愛族)은 하나인 줄 알았다. 민족적인 생각과 행동이 바로 국가를 위하는 길인 줄 알았다. 그만큼 우리에겐 한겨레, 한민족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선 동족에 매달리다 자칫 국가의 장래를 망치는 경우가 생길까 우려스럽다.

해묵은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이번에는 결말이 날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련만 북한이 집요하게 걸고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개운치 않다. 또 과거사 규명이 느닷없이 역사의 필연처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밀린 숙제를 하고 넘어가자는 여유를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논의의 수준이나 조급증을 만나게 되면 이 또한 석연치 않다. 사태의 전개를 보면 영락없는 이념논쟁이고 애국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우리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념을 추구했고 그래서 동족 간에 전쟁까지 치렀으며 여전히 가볍게 다루기엔 위험한 북한이 같은 민족이란 이유만으로 우리는 국가의 이익과 거리가 있는 소모적인 푸닥거리에 휘말려 있다. 내실 있고 차분하게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건설적인 논쟁이건만 가는 길에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다. 당시 우리 대통령은 취임식에서'동맹보다 민족이 우선'이라고 외친 바 있다. 파장을 헤아려 보지 않은 채 북한과 미국을 향해 던진 이 메시지는 며칠 만에 북한 핵문제와 한.미 동맹 표류의 시작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민족이란 구호가 주는 묘한 호소력이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데 멍에가 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민족공조를 꿈꾸고 있다.

동족이 아니라면 탈북자 수용에 너그러울 수 없으련만 그러면서도 북한주민의 인권 개선을 표방한 미국의 북한 인권법안에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다른 나라가 개입한 데 대한 자괴심의 표현인가. 아니면 북한 포용이란 국가의 정책노선과 배치되기 때문인가. 북한의 정권과 주민을 달리 인식하며 대북관계를 관리한다는 게 정부 정책의 기초였다면 북핵 해결과 탈북자 처리는 구분돼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련만 탈북자 수용 때문에 핵문제 해결이 어려워질까 전전긍긍하는 정부의 자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민족공조를 앞세워 외세와의 투쟁을 외치면서도 민족의 공존을 위태롭게 하는 핵무기 개발은 포기하지 않는 북한을 그래도 '애국' 아닌 '애족'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핵무기가 동족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핵의 존재만으로 국제사회 속에 국가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있다.

아직도 민족을 운운하며 정체성 찾기에 급급한 나라는 세계에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결같이 퇴영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고 또 부인하려야 그럴 수도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세계 속에 우수함을 인정받아야 마땅한 것은 아니란 사실만큼은 받아들이자. '애족'이 '애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어설프지 않다. 또 동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 다루기에 남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도 설 땅이 없다. 이제 민족 타령은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나름대로 애국하려는 이들을 반(反)민족적이라 매도하는 짓도 그만두자. 북한이 한국의 장래에 희망이 아닐 뿐 아니라 민족의 미래에도 멍에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민족에 집착해 국익을 해치는 아둔한 자해행위에서 자유로워질 때도 됐다. 적어도 지금은'애국'이'애족'보다 우선이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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