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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아이 사랑] 1. 노는 것도 공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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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예부터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한(限)이 없다.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조금 유별나다.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아이들에게는 최고를 먹이고 입힌다.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휴일에는 전시회나 음악회에 끌고 다녀야 성이 찬다.

아이에게 쓸 돈이 모자라면 허드렛 일도 마다하지 않는 현대판 한석봉 어머니까지 등장하는 실정이다.

베푸는 부모들은 힘들고 벅차고, 받는 아이들은 괴롭고 부담스러운 '일그러진 아이 사랑' 이 우리의 현주소다.

2000년을 마감하고 2001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 대한 참 사랑의 방향과 가치를 5회에 걸쳐 모색해본다.

지난 18일 일산신도시 한 초등학교.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나오는 코흘리개들의 표정이 밝지만 않다. 끼리끼리 모여 운동장에서 한바탕 공이라도 신나게 차야 할 아이들이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엄마가 컴퓨터학원과 수학학원을 더 등록했대요. 방학동안에 놀지도 못하게 만든 거예요. 매일 가는 영어학원도 지겨워 죽겠는데…. "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학교 정문을 나오는 조모(초등2)군의 하소연이다.

빠듯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이를 이 학원 저 교습소로 보내는 부모의 지극정성(?

)이 조군에게는 '즐거운 방학' 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부담이 큰 모양이다.

한창 뛰어 놀 개구쟁이들이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놀 틈이 없다. 잠시 짬이 나더라도 이들은 컴퓨터라는 신종 장난감에 빠져 방안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방학이 시작됐는데도 동네 놀이터에 코흘리개들이 보이지 않고, 주인 잃은 놀이터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칼바람만 쌩쌩 분다.

"아이들의 놀이 환경이 너무 달라졌어요. 부모님들은 '다른 아이에게 뒤질까봐' 라고 변명하지만 내 자식만은 '최고' 와 '만능' 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그 이유지요. 컴퓨터 역시 아이들을 방안과 PC방에 묶어 두고 있습니다. 자연히 남과 어울려 놀 줄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길들어지게 되죠. "

초등학교 교사 6~7명이 주축이 된 놀이연구회 이동욱(30.서울난우초등학교)교사의 말이다.

그는 "노는 것은 공부의 반대 개념이 아닌 공부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며 "아이들은 놀면서 협동심.창의력.도덕성 등 교과서에 부족한 사람됨을 배운다" 고 덧붙였다.

일산에 사는 김상선(40).서수정(35)씨는 이교사의 조언대로 실천하는 대표적인 부모. 서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는 김씨 부부는 두 아이 희수(6).희경(3)이가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한다.

큰 아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지만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을 보낸다.

그렇지만 아이가 가기 싫다면 언제든지 오케이. 킥보드를 타고 싶다면 호수공원으로, 날씨가 좋으면 엄마.아빠와 함께 정발산에 오른다.

주말에는 승합차에 네 식구가 몸을 싣고 시골풍경이 있는 곳을 간다.

이를 위해 김씨는 승합차 맨 뒷좌석을 없애고 그 곳에 자전거.스케치북.소꿉놀이 등 장난감을 싣고 다닌다. 언제든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채비가 돼 있다.

"신나게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궁금한 것이 생겨요. 그럴 때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은 평생 잊지 않지요. " 엄마 서씨의 주장이다.

그는 이어 "얼마전 큰 애가 오징어는 넓적한데 왜 횟집 수족관의 오징어는 팔뚝처럼 생겼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며 "아이가 그동안 놀면서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키운 것 같아 기뻤다" 고 덧붙였다.

박경식(38).이은미(37)부부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지난 9월 경기도 양평으로 집을 지어 이사했다.

기존에 살던 분당에서는 아이들을 마음껏 놀리며 키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집 구조도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꾸몄다.

큰 딸 수미(초등3)와 작은 딸 우미(초등1)의 2층 방에는 낮이면 파란 하늘을, 밤이면 별을 볼 수 있는 하늘 창을 내주었다.

특히 낙서를 좋아하는 우미의 방 한쪽 벽면은 아예 백지로 도배했다. 지저분해지면 아빠가 수시로 새로 벽을 발라 준다.

아빠 박씨는 "수줍음을 많이 타던 두 계집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사내아이 수준으로 극성스러워졌다" 며 "방과후에 옆집 언니.오빠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며 몸도 많이 튼튼해졌다" 고 자랑이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현우(6)의 놀이는 요리하기. 엄마 김현정(32)씨는 차가운 감촉과 던져도 깨지지 않는 금속성.플라스틱류의 일반 장난감이 싫어 현우에게 어릴 적부터 감자.오이.사과.밀가루 반죽 등을 장난감으로 쥐어줬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보내는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장보러 다니고, 음식을 만들 때는 옆에 두고 칼이나 가스레인지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도 일러주었다고 한다.

현우는 이제 간단한 아침식사거리를 엄마의 도움없이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만들어 낼 정도다. 가끔 유치원 친구들을 불러다 자신이 만든 음식도 대접하며 논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43)소장은 "요즘 맞벌이부부들이 많아 아이들에게 충분히 놀 공간과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게 무척 안타깝다" 며 "주말이라도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빠.엄마도 함께 어울려 줄 것" 을 권했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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