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도요타 리콜, 강 건너 불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3호 34면

딱 보름으로 충분했다. 76년간 혼신을 다해 쌓아 올린 ‘품질 신화’를 해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창업주의 손자인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나흘 새 두번이나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한번 눈 밖에 나자 뭘 해도 꼬투리를 잡혔다. 처음 고개를 숙였을 땐 여전히 목이 뻣뻣한 것 아니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나름 친절한 설명을 위해 일본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 답변한 건 ‘고장난 영어(Broken English)’라는 조롱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두 번째 사죄 인사 때엔 더 큰 각도로, 더 오랫동안 허리를 굽혔다.

그래도 불안한 CEO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용서를 구하려고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있다. 일본의 자랑이자 국가 대표 기업으로 추앙받아온 도요타자동차 이야기다. 도요타는 사실 자동차 종주국 미국에서도 국민차로 통했다. 두세 집 건너 캠리나 렉서스를 타는 건 마치 우리나라에서 TV나 냉장고를 고를 때 삼성전자·LG전자를 찾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이민 온 일본 초등학생이 눈치 없이 ‘도요타는 일본 차’라고 떠벌리자 미국 학생들이 ‘무슨 소리냐. 우리나라차인데’라며 발끈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도요타는 코카콜라, 맥도날드 햄버거 못지않게 미국에서 사랑받는 아이콘 중 하나였다. 이게 다 일본 특유의 ‘모노즈쿠리(장인 정신으로 심혈을 기울여 명품을 내놓는다)’가 담겨 있다는 이미지 덕분이었다.

한데 일순간에 그게 무너졌다. 리콜 파문은 이제 이 회사가 내놓은 거의 모든 차의 불량 의혹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도요타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첨단 하이브리드카마저 희생양이 될 판이다. 25일부터 열리는 미 하원의 도요타 청문회는 이 회사 차의 머리(전자제어시스템)까지 문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모든 파문은 빗나간 ‘도요타 웨이’식 대응 때문에 일어났다. 장인 정신만 있었지 사람(소비자)이 빠진 게 문제였다. ‘자잘한 실수’는 기술력으로 거뜬히 해결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나온 하이브리드차 프리우스의 불량 대응은 기가 막혔다.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는 불만이 쏟아졌지만 ‘기술적 하자가 아닌 운전자의 (둔한) 감각의 문제’라고 되레 소비자에게 면박을 줬다.

도요타의 미숙한 처리는 소비자의 원망을 분노로 변하게 했다. ‘품질 불량’이 불씨를 댕겼지만 이제 대다수 미국인은 도요타의 ‘신뢰 불량’에 더 화가 난 상태다. 미국 언론은 도요타와 얽힌 거라면 10년, 20년 전의 자잘한 사고까지 모두 들춰낸다. 미국 ABC 방송이 얼마 전 ‘911(한국의 119)’의 전화 녹취록을 공개해 전 미국인을 경악하게 만든, 지난해 8월 렉서스 ES 350의 고속도로 폭주 사고도 그중 하나다. 갑자기 속도가 시속 190㎞ 이상 치솟는 바람에 일가족 네 명이 몰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고는 사실 아직도 원인 규명이 안 됐고 이번 리콜 대상에 포함돼 있지도 않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뭐라 한들 상관 없다는 분위기다. 뉴욕 타임스 등 현지 메이저 언론들은 한발 더 나가 도요타 사태를 ‘Made in Japan’의 문제로 끌고 가려고 한다. 현해탄 건너편에서 도요타 사태를 지켜보는 우리 기업인들은 그래서 불길하다. 좋건 싫건 일본을 뒤이어 세계 경영에 올인한 처지라 도요타 사태가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닌 까닭이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솔직히 도요타 리콜처럼 해외에서 메가톤급 파문이 우리 회사에 일어났다면 어떨지 상상하기조차 싫다”고 몸서리쳤다. 홍보 임원 출신의 모 그룹 계열사 사장도 맞장구를 친다. “국내 문제조차도 처음엔 홍보팀이, 그도 안 되면 계열사 사장단이 우왕좌왕하다 결국엔 법률 회사로 달려가는 게 국내 기업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위기 대응책이다.”

도요타는 20년 이상 미국 정·관계에 온갖 인맥을 다져 놓은 거물 기업이다. 팬클럽처럼 끈끈한 수십여 명의 상·하원 의원뿐만 아니라 최고의 로펌과 컨설팅, 로비스트, 홍보 회사의 맥을 꿰고 있다. 세계 2대 경제대국의 간판 기업이란 후광도 만만치 않다. 그런 초일류 기업도 한순간에 벼랑 끝에 몰렸다.

그럼 한국 기업은 어떤가. 품질과 브랜드는 물론, 글로벌 인맥 구축도 이제 겨우 씨를 뿌린 정도다. 게다가 아직 남북한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세계인이 수두룩하다.

글로벌 경영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외길이다. ‘도요타식 파문’을 겪지 않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몇몇 기업들이 이번 사태 직후 부랴부랴 하청업체의 품질을 챙기고 종업원 정신 교육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발성 점검’으로 끝나선 안 된다. 이번 도요타 사태가 우리 기업에 주는 교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