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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본 은행 합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국민.주택은행 합병이 노조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위기에 빠지면서 국내 은행산업을 선도할 초대형 우량은행의 출범이 미궁에 빠졌다.

합병을 추진했던 국민.주택은행측은 물론 구체적인 합병비율 등을 논의하던 골드먼 삭스.ING그룹측은 예기치 못한사태에 할말을 잊은 상태다.

내심 2차 금융구조조정의 핵심을 초대형 우량은행의 탄생에 걸고 있던 정부도 당혹해하긴 마찬가지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국제자금 흐름을 적절히 조절해 외환.금융 위기의 완충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국제적 수준의 네트워크를 갖춘 세계적 수준의 선도은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며 "노조에 밀려 초대형 우량.선도은행을 출범시킬 수 없다면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는 없다" 고 단언했다.

◇ 초대형 우량은행 왜 필요한가=전문가들은 국내 은행산업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세계적 네트워크를 갖춘 초대형 선진은행들에 맞서 국내 시장을 지키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우량은행이 바람막이(선도)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상무는 "국내 은행의 각종 수익성 지표는 아직 국제수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며 "은행산업을 끌고갈 선도은행의 등장이 시급하다" 고 지적했다.

실제 국내 은행은 숫자가 너무 많아 1인당 수익률이나 수신고 등이 국제수준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은행 숫자가 적정선을 넘어선 이른바 '오버 뱅킹(over banking)' 이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

대표적인 우량은행이라는 국민.주택은행의 경우 지난해 말 현재 은행원 1인당 총자산은 74억8천만원.62억6천만원으로 씨티뱅크나 HSBC 등 외국은행 국내지점의 1백13억원.1백5억원에 비해 크게 적다.

자산을 굴려 얻어내는 이익률(ROA)도 국민(0.16).주택(1.02)이 씨티(1.84).HSBC(0.89)보다 작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경쟁정도를 따지는 허쉬만-허핀달지수(완전 독점일 때 10, 000. 1, 000 이하는 경쟁포화를 의미)는 한국이 600으로 미국의 2, 000에 비해 3배 넘게 경쟁이 치열한 과포화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은행수가 많다고 꼭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 은행은 그간 정부의 보호 속에 영업을 해와 독자생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며 "시장원리에 의해 합병 등이 이뤄져 은행 숫자가 조절돼야 한다" 고 지적했다.

◇ 합병 통해 경쟁력 높여야=과포화 상태인 국내 은행산업을 개편하려면 합병은 불가피한 선택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감위 관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진국들은 대형 선도은행을 통해 국제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며 "세계 금융시장이 이미 하나로 통합돼 있는 국제현실을 무시하고 우리 은행들의 구조조정을 더 늦춰서는 국내시장마저 모두 내줄지 모른다" 고 우려했다.

정부가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민.주택은행 합병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금융계 관계자는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구조조정보다 우량은행간 통합이 시장의 자율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도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노조에 밀려)양보해서는 안된다" 며 "2차 금융구조조정을 지금 매듭짓지 못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다" 고 말했다.

연세대 박상용 교수는 "대형 은행간 합병은 두 은행의 중복 점포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시너지 효과가 있다" 며 "독자생존을 고집하면 과다 점포.인력을 줄이는 구조조정에 한계가 있다" 고 말했다.

산업연구원 고동수 박사는 "일자리를 잃는 노조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은행 합병 등 구조조정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봐야 한다" 며 "합병 결정은 주주들의 권한이란 사실을 노조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이정재.신예리.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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