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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윈도] '모범생' 고어의 패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나이 52세에 17만달러 정도의 연봉을 받는 미국인이 주식 투자를 하지 않을 확률은 1백분의 1이라고 한다. 미 대선에서 고어 민주당 후보는 자신을 그 작은 확률 속에 가둬놓고 있었다.

그는 "공인의 주식투자는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 24년전 하원의원에 출마하면서 주식투자를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 말의 시비곡직을 떠나 고어는 그렇게 정치인생의 최종 목표를 향해 자신을 가다듬어 왔다.

고어는 대통령이 되도록 설계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2년 동안 상.하원 의원을 지낸 아버지,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한 아버지의 집념, 남녀평등.교육.환경에 눈을 뜨게 한 어머니, 그리스 조각 같은 용모, 12년의 명문사립 모범생 수학(修學), 하버드 대학, 정치적 장래를 고려한 베트남 종군, 하원의원 8년에 상원의원 7년, 그리고 부통령 8년…. 시절도 그의 편이어서 디지털 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앞에 21세기 정보화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성실했으며 자신만만했다. 1988년 민주당 대선 후보 예선에서 패한 것이 거의 유일한 인생 곡절이었다.

그는 설계도대로 2000년 대선에 출마했고 후보 경선에서 프로농구(NBA)출신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을 물리쳤으며, 텍사스 카우보이 부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가 부시에게 뒤진다는 여론조사도 사실이 아니었다. 뚜껑을 열자 그는 미국 전체에서 33만표를 앞섰다. 플로리다에서는 개표를 할 때마다 표차가 줄어들었다.

"더 많은 미국인이 나를 찍었어. 며칠만 더 기다리면 될 거야. 손으로 까보면 투표용지가 대통령이 누구인지 말해줄 거야. "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연방대법원은 수작업 재검표를 중단시켰고 그는 외통수에 몰렸다. 졌다고 승복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선거였다. 몇년을 준비해온 것인데…. 지지자들의 함성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어는 깨끗하게, 말 그대로 깨끗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런 승복도 4년후를 겨냥해 설계된 것인지 모른다.

어찌됐건 그의 연설은 미국을 다시 단합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언론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승복연설' 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패배였고, 어려운 승복이었다.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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