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의 현장] 차기 한은 총재, 당당하게 사전 검증 받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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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KB금융 회장 인선을 놓고도 요란한데, 비교가 안 되게 중요한 자리 아닙니까?”

“한은 총재 내정자의 인사청문회는 언제쯤 열리는 건가요?”

“그 자리엔 청문회가 없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끝이죠.”

“그런가요? 몇 달 일하다 그만두는 장관도 청문회를 거치는데….”

얼마 전 금융시장 관계자들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 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의 임기 만료가 눈앞에 닥쳤지만, 후임에 대해선 오리무중이다. 구체적으로 누가 올지를 떠나 어떤 경륜과 덕목을 갖춘 사람이 와야 할지 국민도 언론도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대통령의 경제 참모이자 대학 후배인 모씨가 유력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고 있는 정도다.

이성태 총재의 재임 4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부동산 거품을 겨우 가라앉히고 안도하던 순간 갑자기 밀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은에 큰 시련이었다. 특히 초동 대응에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와 마찰 때문에 소신을 펴지 못하기도 했다. 이는 한은의 통화정책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도 차기 한은 총재는 제대로 뽑아야 한다.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는 흔히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다. 돈의 가치를 안정시킴으로써 국민의 재산을 지켜주는 최후의 파수꾼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법으로 명시하는 이유는 국가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국민만 바라보며 일하라는 명령에서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 수장에겐 경제 흐름을 꿰뚫는 전문지식과 통찰력, 그리고 시장의 심리를 어루만지는 믿음직한 성품 등이 요구된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선진 각국은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친다. 지난달 연임에 성공한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를 공식 지명한 게 지난해 8월이었다. 그 뒤 그는 금융계와 언론 등의 여론 수렴 과정과 의회의 인사청문회, 상원의 최종 찬반투표를 거쳐 5개월 만에야 연임 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런 절차가 생략된다. 한국은행법을 보면 총재 선임과 관련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고만 돼 있다. 현 이성태 총재도 전임 박승 총재의 임기 만료 1주일 전에 청와대로부터 내정을 통보받은 게 임명 절차의 전부였다. 모름지기 새로운 총재는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지금이나 그때나 끼어들 틈이 없다.

때마침 일부 야당 의원이 한은 총재 임명 때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는 한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소식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여당의 화답이 없고 시일도 촉박해 이번에는 안 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긴 하다. 설사 4년 뒤를 위해서라도 여야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으면 한다. 물론 비리 캐기나 흠집내기식의 저질 청문회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아울러 청와대가 이번만큼은 당당하게 국민과 시장의 사전 검증을 받겠다는 자세로 차기 한은 총재 내정자를 가급적 빨리 발표하길 기대해 본다.  

김광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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