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사계] '해적판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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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베이징(北京)의 중심가인 창안제(長安街)에 있는 개봉관 서우두(首都)극장이 최근 울상이다.

대만의 인기감독 리안(李安)이 메가폰을 잡고 저우룬파(周潤發).장쯔이(章子怡)등이 주연한 영화 '워후창룽(臥虎藏龍.숨은 인재란 뜻)' 의 매표 실적이 기대 이하여서다.

당초 기대한 '전회(全回)매진' 의 꿈은 깨진 지 오래다. 지난달 20일 상영을 시작했지만 5백석 규모의 메인홀을 반도 못채우는 일이 다반사다. 때문에 최근엔 상영장소를 70여석의 작은 홀로 바꿨다.

베이징 개봉관들은 5백만위안(약 7억원)의 입장수입을 기대했지만 실적은 2백만위안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上海)에서도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다. 영화가 재미없다면 감수해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상당수 베이징 시민들은 영화가 상영되기도 전에 불법복제 CD를 통해 이 영화를 봤다.

베이징 길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이같은 불법복제 CD 판매상을 만날 수 있다. CD 한개에 보통 10위안 정도. 흥정만 잘 하면 7~8위안으로 떨어진다. 영화관 입장료의 3분의1만 들이고도 영화를 볼 수 있으니 불법복제 CD가 판을 치는 것이다.

중국의 인민문학출판사도 지난달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해리 포터' 의 중국 내 판권을 따낸 이 출판사는 지난 10월 6일 전국 서점에 일제히 중국어 번역본을 내놨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이미 한달 전에 인쇄된 해적판이 서점에 먼저 진열돼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적판 관련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중국의 한 기자는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인 둥젠화(董建華)가 관심의 초점이 될 것에 착안, 董의 일대기를 썼다.

그러나 인세는 실제 팔린 책의 6분의1에 대해서만 받아야 했다. 판매된 1백20만권 중 해적판이 1백만권에 달했기 때문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가짜 서적과 음반이 진품의 10배 정도 된다고 하니 '해적판 천국' 이란 오명은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목전에 둔 중국이 하루빨리 벗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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