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관현악곡 설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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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오케스트라는 창작음악의 무풍지대인가.

관현악 작곡은 공모 또는 위촉을 통해 연주기회를 보장하지 않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작업이다.

하지만 국내 교향악단은 창작곡 위촉.초연에 거의 무관심하고 문예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초연되는 극소수의 작품들도 두번 다시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다.

지난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3회 한민족 창작음악축전에서 최승한 지휘의 수원시향이 악보 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한 4곡을 초연했다.

작곡가.지휘자.평론가로 구성된 14명의 심사위원단은 대상 수상작에 이신우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 , 본상에 임준희의 '카르마' 를 선정.발표했다.

'보이지 않는 손' 은 바이올리니스트 김현미의 성실한 연주로 더욱 돋보인 작품. 탄탄한 기본기에다 적절하고 효과적인 악기 편성과 활용으로 소리를 아끼는 것도 미덕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낭만적 서정이 풍부하면서도 결코 유치하지 않은 감동으로 연결됐다. 현대음악이 결여하기 쉬운 영성(靈性)을 회복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바이올린의 모습에서 작곡가를 '불청객' 쯤으로 여기는 음악계 풍토에서 창작혼을 불태우면서 살아가는 한 젊은 작곡가의 초상으로 비춰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카르마' 는 음악적 스토리를 엮어가는 아이디어나 관현악적 효과는 뛰어났으나 클라이맥스 설정이 상투적이었다.

함께 본선에 오른 김주풍의 '두물머리' , 이근형의 '신천년' 등은 '한민족의 얼이 담긴 창작음악을 발굴해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 는 대회의 취지에 충실하려다 보니 음악양식의 일관성을 상실했고 15분이 넘게 음악을 이끌어 가기에는 구성력이 약했다.

이들 작품이 보여준 취약점은 작곡가들이 '악기' 를 쉽게 구할 수 없는 국내 현실에서 빚어진 것이다. 연주기회가 자주 없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한민족 창작음악축전은 작곡가들에게 창작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제1~2회 대회의 대상.본상 수상작 대부분이 초연으로 그치고 다시 연주되지 않는 '작곡계의 집안 잔치' 로 끝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작곡상.공모전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매년 4개의 관현악곡을 공모.위촉하고 있는 서울음악제도 초연에 그치기는 마찬가지고 악보 심사로 수상작을 결정하는 대한민국 작곡상은 수상작에 단 한번의 연주 기회도 주지 않고 있다.

문제는 KBS교향악단 등 국내 주요 오케스트라들이 창작곡 위촉.초연에 대한 예산을 세우지 않고 모차르트에서 말러까지 1백50년 동안에 작곡된 스탠더드 레퍼토리에 안주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올해 두 곡을 연주한 서울시향의 올해 창작곡 예산은 2백만원. 강준일의 '만가' '천년 천세지곡' 의 악보 사용료다.

오케스트라를 가리켜 '음악 박물관' 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박물관에 18.19세기 작품만 전시하라는 법은 없다. 살아있는 작곡가의 작품을 '전시' 하는 코너도 마련해야 한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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