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읽기] 꼬리에 꼬리무는 자막, 공해수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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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과잉친절은 그 본의를 의심케 한다.

TV 화면 속에 자막이 느는가 싶더니 지금은 도를 넘어 시청자를 피곤하고 짜증나게 한다.

처음엔 불량한 음향 상태를 보완해 주는 수준이던 게 지금은 출연자의 모든 말, 심지어 심리상태까지 중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화면에 자막을 띄우거나 심는 주체는 두 부류다. 하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PD의 의도로 이루어진다.

드라마의 경우 대체로 제목이나 출연진, 스태프를 알리는 게 전부다.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이 재미의 도우미 역할을 한다고 믿는 PD들이 의외로 많다.

일본의 오락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한국의 경우와 참 흡사하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챌 것이다. 자막의 내용이나 모양, 위치 등이 거의 만화를 방불케 한다.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있는 엄정화' '무턱대고 좋아하는 유승준' 에서부터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인지, 아이들 글자 공부시키려는 의도인지 내뱉는 모든 말, 이를테면 '안녕하세요' 나 '감사합니다' 까지도 죄다 글자로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교양프로그램도 점차 닮아 가는 추세다. 글자가 없으니까 왠지 휑하다고 느끼는 건지 없어도 좋을 (실상 없으면 좋을)글자가 남발되고 있다.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도중 주조정실의 MD(Master Director.송출감독)에 의해 띄워지는 자막군이 또 만만치 않다.

이 시간 이후의 프로그램 순서 예고에서부터 곧이어 방송될 뉴스 내용 요약, 마당놀이 행사 또는 개그맨 선발대회 등 자사 이벤트 홍보, '내일은 민방위의 날입니다' 등 정부 행사 고지, RH 마이너스 O형의 피를 급히 구한다는 어느 병원의 호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하다.

자막은 상황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대부분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드라마가 진지한 국면에 접어들 때 화면 밑으로 글자가 줄지어 지나가면 화면 속의 배우는 울고 있어도 시청자는 이미 글자의 홍수에 정서가 떠내려간 지 오래다.

겹치기는 스타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 프로그램에서 자막이 서로 겹치는 경우도 빈번하다.

PD의 노파심과 MD의 의무감이 충돌하는 사례다. 일반 출연자가 TV에 모처럼 출연해 이름이 나가려는 찰나에 MD가 띄운 자막과 겹쳐 그 신상이 묻히는 경우도 흔하다.

이때 황급히 자막을 멈추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끝까지 내보내는 대범함(?)도 눈에 띈다.

글자는 표기의 원칙이 있고 맞춤법은 최소한의 예의인데 그나마 방송에선 올바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우리말 나들이'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정색을 하고 바른말 고운말을 가르치던 TV가 정작 실전에 들어가서는 마구잡이로 틀린 말을 날리고 있다.

아나운서실이건 심의실이건 제발 자사 프로그램의 제멋대로식 표기를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넘치는 건 비효율일 뿐 아니라 역효과다.

자막은 꼭 필요할 때 써라. 이왕에 쓰려거든 제대로 써라. 기분 좋게 화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시청자를 배려하라.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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