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집값 올라 주도권 다툼 … 꼬투리만 잡히면 “법정 가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4면

서울 송파구의 한 대형 아파트단지는 재건축을 추진한 지 10년이 지났으나 소송이 얽혀 진척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이런 소송으로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지가 서울에만 40여 곳이나 된다.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도심에서의 주택 공급을 늘려야 서울 집값이 안정된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도심에서는 주택 재개발·재건축 외에는 새 주택을 공급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2008년 잇따라 재개발·재건축 관련 규제를 많이 풀고, 용적률(지상 건축 면적을 대지 면적으로 나눈 비율) 상향 등의 활성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소송에 발목이 잡혀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에서 이해 당사자 간의 다툼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모여 벌이는 사업이다 보니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토법률사무소 김조영 변호사는 “주민들마다 입장이 다른 데다 전 재산인 집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에는 주택 가치가 높아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주민들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는 조합장의 직무정지 소송이 제기되는 등 주민들 간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다. 인근의 한 중개업소 김모 사장은 “사소한 것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사업 주도권을 빼앗거나 지키려고 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민들 간 주도권 다툼 외에도 사업 주체인 조합·추진위의 비리나 건축비·추가 분담금 상승 등이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조합·추진위나 사업 자체에 반기를 든 주민들이 소송을 내는 것이다.

이들 주민은 대개 ▶백지동의서(조합원 서명 없이 조합에 일임한 동의서) ▶정비구역 지정 전 설립된 추진위 ▶단계별 주민 동의율의 적법성 ▶느슨한 구역지정 요건 등을 문제 삼아 사업 주체와 자치단체를 상대로 구역지정 취소나 조합·추진위설립인가 무효 소송을 낸다.

동작구의 A재개발 구역은 조합이 사업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다며 주민들이 조합설립인가 무효 소송을 냈고, 서대문구의 한 재개발 구역은 추가 분담금이 당초 예상보다 많이 나오자 일부 주민이 사업에 반대하며 관리처분인가 취소 소송을 냈다. 성동구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는 일부 주민이 구역지정 직후 서울시의 구역지정 요건이 너무 느슨하다며 정비구역지정 취소 소송을 냈다.

이 같은 소송이 느는 데는 주민이나 건설사의 이해 관계 탓만 있는 게 아니다. 관리감독을 해야 할 정부와 자치단체는 늑장 대처 등으로 오히려 화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령 정비구역지정 전 설립된 추진위원회 적법성 논란은 2003년 관련법 개정 이후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지난해 관련법을 고쳤다.

결국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정비구역지정 전 설립된 추진위는 무효”라고 판결했고, 이후 강남권 재건축 단지들에서 이를 근거로 한 유사소송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최근 왕십리뉴타운 1구역 판결을 계기로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백지동의서는 자치단체의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라는 지적이다.

왕십리뉴타운 소송에 참여한 법무법인 한별의 현인혁 변호사는 “백지동의서인 줄 알면서도 묵인한 자치단체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서울 재개발 구역 20여 곳이 백지동의서를 받았고, 이 중 15곳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황정일 기자


“조합원 비용분담 상세히 … 공공기관이 사업 맡아야”

소송·분쟁 줄이려면 서울시는 올해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1만5000여 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당장 4월 1700여 가구를 분양할 예정이었던 성동구 왕십리뉴타운 1구역은 지난달 법원의 조합설립인가 무효 판결로 공급시기를 알 수 없게 됐고, 강동구 고덕주공2·3단지 등도 최근 소송에 휘말리면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관리처분계획인가(분양 단계)를 받은 주택은 5234가구로 당초 예상(1만806가구)의 48% 수준에 그쳤다. 서울시 주택정책팀 송호재 팀장은 “소송 등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지에서 아파트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수급 불균형으로 주택시장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최근 강남권 집값이나 전셋값이 불안한 것도 지난 정부가 재건축을 옥죄면서 최근 몇 년간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중단된 탓이 크다”고 말했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안 돼 가격이 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규제만 풀 게 아니라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개발·재건축 컨설팅업체인 J&K부동산투자연구소 권순형 소장은 “결국 주민들 간 분쟁을 줄여야 공급이 제대로 이뤄져 주택시장을 안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주민들의 재산이 직결돼 있어 분쟁을 뿌리뽑기는 힘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도적으로 사업의 투명성을 높이면 분쟁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관련법이나 규정 등을 손질하는 것도 시급하다. 예컨대 조합설립 동의서에는 비용분담을 적도록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김조영 변호사는 “모호하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규정을 정비해 소송의 빌미를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등이 사업 전반을 맡아 진행하는 공공관리자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한남뉴타운 일대가 공공관리자제도 시범지구로 지정돼 있고, 관련 법안이 지난해 발의돼 국회에 계류돼 있다. 서울시 공공관리과 김장수 정책팀장은 “공공관리자제도를 도입하면 투명성을 높이는 동시에 공공성도 확보할 수 있다”며 “조합설립인가 이전 구역에 의무 적용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