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리스발 위기로 빚 많은 미·영·일 신용등급 하락할 것”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프랭클린 앨런 와튼스쿨 석좌 교수가 1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중앙SUNDAY와 만나 “유럽 국가들의 부도 도미노가 세계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며 “미국·유럽이 중국 등 아시아를 대등한 동반자로 여기고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함께 손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금융체제를 자기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의 저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동반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세계 경제위기를 막을 수 있다.”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 초청 세미나(한국의 사례를 통해 본 세계 경제 불균형) 참석차 1일 방한한 프랭클린 앨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석좌교수는 서구에서 몇 안 되는 ‘국제통화기금(IMF) 개혁론자’다. 미국과 유럽이 장악한 IMF의 ‘일방통행식’ 세계 경제위기 관리 시스템을 하루빨리 뜯어고치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마침 미국이 연일 ‘아시아 때리기(중국 위안화 절상 압박, 일본 도요타 리콜 비판)’에 나선 때라 그의 견해는 더 주목받고 있다. 앨런 교수는 “도요타 사태는 일본 경제위기 상황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며 “파문이 일본 전체 산업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 초청 방한

그는 또 “최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창한 ‘은행 규제’는 (선거를 의식해) 민심을 달래려는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며 정작 문제의 근원지인 통화 당국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평가절하했다.

중앙SUNDAY는 앨런 교수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또 다른 글로벌 경제위기 가능성이 있는지, 또 그가 생각하는 위기 재발 방지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 봤다.

-2008년 말 돌출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끝났다고 봐도 되나.
“‘위기가 끝났다’라기보다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Change in phases)’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개별 국가의 채무가 위험 수위까지 치닫고 있다. 국가 부도 도미노다. 이 이슈가 글로벌 경제에 또다시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당장 그리스가 문제다. 아르헨티나 역시 국가 부도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다음엔 포르투갈로 가고 이어 이탈리아로 불똥이 튀는 등 계속 번질 것이다. 정부가 파산하면 민간 경제는 보호막을 완전히 잃게 된다. 빚이 많은 선진국도 잠정적인 시한폭탄이다. (국가 채무가 많은) 미국·영국·일본 등은 국가 신용등급 하락을 피하기 어렵다.(공교롭게도 앨런 교수의 이 같은 경고가 나온 지 나흘 뒤인 5일(한국시간) 유럽발 국가 부도로 세계 증시가 동반 급락하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이 연일 요동치고 있다.)”

-그리스는 유럽연합(EU) 소속이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나.
“EU는 사실 매우 분열된 조직(fragmented organization)이다. 그리스 지원만 해도 EU 조약에 명시돼 있지 않다. 그런 상황인데 누가 소방수로 나서 주겠나. 이전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독일이 돈을 냈다. 그러나 독일도 이제는 선뜻 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것 같지 않다. 어렵게 마련한 돈이 그저 그리스 공무원들이 발 뻗고 편히 생활하는 데 들어가면 용납을 하겠는가. 게다가 EU가 지원금을 남발하면 기축통화로서 유로화 지위가 휘청거릴 수 있다.”

-또다시 전 세계에 경제위기가 닥친다면 한국도 위험하지 않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변동환율제를 고수하고 있고 외환보유액도 넉넉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한국은 지난번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매우 잘하지 않았는가. 원화가치 하락 덕을 많이 본 건 사실이다. 그렇긴 해도 삼성 등 한국 기업들의 탄탄한 경쟁력이 위기 탈출에 큰 힘이 됐다. 한국 기업은 임직원을 독려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잘 활용한 덕에 성과를 잘 내고 있는 것 같다.”

-국가 채무 문제 말고 세계 경제에 부정적인 변수가 될 만한 요인을 꼽는다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계속 부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과 싱가포르가 심상치 않다. 싱가포르의 경우 지난해 3분기에만 부동산 가격이 16%나 치솟았다. 중국도 부동산 버블이 시작되고 있다. 사실 중국은 돈이 너무 많아 어디에다 써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런 중국이 긴축에 나서면 아시아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

-도요타 리콜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계 고급차 시장을 선도하는 독일 아우디도 20여 년 전에 미국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는데 그걸 극복하는 데 5∼10년이 걸렸다. 도요타의 리콜 파문이 전 일본 산업으로 확산(spill-over)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기업들은 최근 몇 년 새 눈에 띄게 경쟁력을 잃었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어떻게 종업원들을 고무시키는지에 대한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소니·파나소닉이 대표적으로 길을 잃은 기업들이다.”

-일본 기업들이 특별히 고전하는 이유는.
“일본은 문제가 많다. 10년 전 일본과 지금은 너무 틀리다. 한마디로 경제가 잘 기능하지 못하고 있고 뭔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특유의 치밀함도 많이 사라졌다. 최근 도요타 리콜 사태가 이를 잘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게다가 국가 전체로도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여기엔 일본 특유의 국민 정서도 한몫한다. 이른바 ‘평등주의(horizonal society)’란 발목에 잡혀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강력한 은행 규제 방안을 내놓았다. 이게 글로벌 금융 안정에 도움이 되겠나.
“오바마의 은행 규제 제안은 정치적인 제스처다. 의미가 없다곤 볼 수 없지만 지금의 금융위기엔 별 도움이 안 된다. 돌이켜 보면 글로벌 위기가 닥친 데는 은행보다 저금리를 고집해 자산거품을 만든 공적 부문의 잘못이 훨씬 크다. 하지만 오바마는 이 같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 같다. 벤 버냉키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다시 지명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부실 금융사 처리 문제는 훨씬 단호해야 한다. 은행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인수해 단기 자금 부족 현상이 빚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부실한 은행의 주요 경영자(톱5)들에겐 다 사표를 받고 은행들이 파산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IMF의 개혁 필요성을 계속 역설하고 있는데.
“IMF의 개혁은 글로벌 경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손보자는 것이다. 물론 IMF가 지금까지 잘못만 한 건 아니다. 1991년 인도의 금융위기 때는 IMF가 적절한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IMF 지배구조(governance)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세계가 변화하는 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90년대 후반 한국에 요구한 경제 개혁 요구는 완전한 오답이었다. 서방 세계가 뒤늦게 IMF 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자세히 보면 별로 큰 개혁도 아니다. 특히 개도국 처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97년 IMF의 한국 처방이 왜 문제였나.
“당시 IMF는 잘못된 처방전(고금리·재정긴축)을 내렸고 이에 놀란 아시아 국가들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았다. 이 돈 중 상당 부분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 거품경제를 일으키고 결국 2008년 글로벌 위기를 초래했다.”

-왜 이런 상황이 빚어졌나. IMF 개혁에 대한 복안은 있나.
“한마디로 미국·유럽이 일방적으로 IMF를 움켜잡고 있어서다. 반대로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완전히 소외돼 있다. 이들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현재 미국과 유럽은 IMF 내에서 약 50%의 의결권(voting share)을 갖고 있다. 미국·독일·영국·프랑스 등 상위 5개국의 비중도 40%를 웃돈다. 이들이 사실상 글로벌 금융정책을 좌지우지한다(한국은 1.34%로 19위에 머물고 있다). 중국의 의결권 비중을 높여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미국·EU·중국이 각각 17%의 지분으로 맞춰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

-미국 등 서구가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있겠나.
“물론 미국이나 서구 유럽은 중국 지분이 늘어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 지분이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은 외환보유 금고에서 5000억 달러를 꺼내 아프리카를 돕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판 ‘마셜플랜’인 셈이다. 중국은 실제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구보다 중국에 도움을 청하러 갈 가능성도 크다. 이런 움직임이 세계 정치와 경제를 바꿀 것이다.”

-IMF 지분 확대 외에 중국과 아시아 국가가 파워를 키우는 다른 방법이 있나.
“치앙마이 이니셔티브(2000년 한·중·일 3개국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이 역내 외환위기 발생을 막기 위해 체결한 통화 교환 협정. 이를 위해 1200억 달러의 공동 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가 매우 흥미로운 시도다. 이게 제대로 작동하면 중국이나 아시아는 더 이상 서구에 기댈 필요가 없다. 장기적으로 역내에서 중국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는 시도도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 경제 안정에 한국이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보나.
“물론이다. 한국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 글로벌 위기를 가장 잘 극복하고 외환보유액도 든든하다. 무엇보다 미국·중국과 모두 친하고 주변에 적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개발도상국들엔 경제 개발과 위기 극복의 모델이 된다.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나 주요 20개국(G20)을 통해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기 직전인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중국과 미국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슬기로운 ‘중재자’ 역을 맡아 주느냐 여부가 세계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관건이 될 것이다.”

-중국의 경우 그 위상이 과도하게 커지는 것도 또 다른 문제를 낳지 않겠나.
“미국이 파워를 잃는 것은 복잡한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에 (모든 패권을 미국이 중국에 빼앗긴다는 것은)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국이 영향력을 급속히 키워 갈 것이란 점은 틀림없다. 중국은 이미 미국·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 됐다. 미국의 압력과 눈치만 안 봤다면 중국은 이미 2년 전 PPP(물가를 반영한 경제력) 기준으로 미국을 제쳤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자기 편을 늘려 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인도 등은 미국 등 서구보다 이제 중국 편을 더 든다. 상황이 이렇게 바뀐 데엔 미국과 유럽이 그동안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쪽으로 세계 경제를 주무른 데 따른 반감도 크다.”

-이른바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근 갈등 고조가 심상치 않다.
“지난주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로 불거진 두 나라 간 갈등이 매우 흥미롭다. 중국은 전에 없이 강력히 반발했지만 미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내 생각엔 미국이 틀렸다. 중국의 위협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2조4000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 중 대부분이 미국 국채다.”

-중국과 미국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경심(mutual respect)이 없다는 게 문제다. 중국 입장에서는 서방 세계의 도움 없이 많은 자국민을 가난에서 구제했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반면 서구에서는 중국이 민주화를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괄시한다. 한마디로 미국과 유럽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를 푸대접하는 게 갈등의 근본 원인이다.”


프랭클린 앨런 교수는
와튼 금융연구원 소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2000년 미국 재무학회장을 역임했다. 2001년도엔 누구보다 먼저 “금융회사에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해 큰 주목을 받았다. 저서인 『기업재무원론(Principles of Corporate Finance)』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금융 교과서 중 하나다.

표재용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