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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두만강 대탐사] 14.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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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4. 一松亭 아래 흐르는 독립혼

옌지(延吉)에서 룽징(龍井)까지는 승용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30분 가량 걸린다.옌지-허룽(和龍)도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모아산(517m)을 만난다.

모자같이 생긴 모아산에 올라보면 멀리 룽징이 보이고 산아래로 해란강이 유유히 세전벌을 가로지나 흐르고 있다.

바로 모아산 아래 룽징촌에서 반일독립운동가 안무(安武)장군은 1924년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의 총에 맞아 룽징자혜병원에서 희생되었다.

모아산에서 룽징시내까지는 내리막길인데 길 양옆에는 룽징사과배 과원이 펼쳐져 있다.과수원의 총길이는 17km로 모아산에서 시작되어 비암산에 이르며 과수나무가 무려 15만그루에 달한다.

해마다 봄이면 사과·배꽃이 하얗게 피어 마치 흰눈이 내린 듯하다.어쩌면 일제 통치하에서 나라를 찾으려고 투쟁하던 선열들의 티없는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듯 하기도 하다.

과거 정처없이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이쪽으로 이주한 조선민족은 그 설움많은 세월속에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멀리 그쪽을 바라보며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이런 마음을 담아 1930년대 룽징을 비롯한 옌볜 일대에서 '고향의 봄'이란 노래가 널리 전해졌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현재 룽징의 총 인구는 27만 3천명.이 가운데 조선족은 18만 6천여명에 이른다.68%가 조선족이 셈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19세기 말부터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지금의 룽징 인근 봉금이란 곳에 숨어들어와 화전농사를 시작하였다.1870년 혹독한 기근이 일자 수많은 난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룽징에는 우리 나라의 첫 조선족근대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옛터가 자리잡고 있다.바로 지금의 룽징 시가 중심에 있는 룽징중심소학교 울안이다.1906년 8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유명한 조선의 반일애국지사 이상설(李相卨)이 자신의 가산을 팔아 룽징촌기독교인사 최병일의 집을 사서 학교를 꾸리었다.당시 룽징벌을 서전벌이라고 불렀기에 학교이름이 서전서숙이다.

초대 숙장(塾長)은 이상설이었고 당시 교원은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영달이었다.야사(野史)지만 이준은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어 가는 길에 룽징에 들려 이상설과 행동노선을 의논한 후 서전서숙에서 한달가량 학생들에게 반일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1917년 룽징시 즈신전(智新鎭) 명동촌에서 태어나 룽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윤동주 시인은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항일사상법으로 투옥되어 1945년 2월 후쿠호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 민족수난의 아픔을 써냈다.

윤동주의 묘소는 룽징동산에 있는 중앙교회묘지에 안치되어 있다.윤동주 이외에도 최서해·강경애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룽징에서 싼허(三合)로 가는 길에서 동쪽으로 약 1백m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 밑에는 1919년 3·13 반일시위투쟁에서 희생된 13명의 열사를 모신 '3·13 반일의사릉'이 있다.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3월 13일 룽징에서도 기세 드높은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룽징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몰려든 3만여명의 조선인은 태극기를 들고 룽징 북쪽 서전벌에서 독립만세축하회를 거행하였다.

이날 정오 3만명이 모인 민중집회에서 김영학·김약연·구춘선 등 옌볜의 반일인사 17명이 기초한 '독립선언포고문'이 선독되었고,천지를 진동하는 우렁찬 만세 속에서 유례균·배향습·황지영 등이 의분에 찬 목소리로 연설하였다.이날 일본경찰의 발포로 13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부상입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반일의사릉을 참배하노라면 인적하나 없는 옛 성터의 황량한 폐허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당시 조선민족의 슬픔을 절감하게 된다.이러한 슬픔을 반영한 노래가 바로 '황성옛터'다.

이 노래는 처음 창작될 때에는 제목을 '황석의 석'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황성옛터'로 고쳐 부르게 됐다.일제는 이 노래에 금곡령을 내려 부르지 못하게 하였지만,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 속에서 널리 불리어졌다.

룽징에서 10여㎞ 남으로 가면 룽징시 지신향에 이르게 된다.육도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성교촌·중영촌·명동촌·장재촌이 있고,그 남쪽에는 소룡동.대룡동.풍략동.화정동이 있다.육도하 서쪽에는 소사동·대사동 등 마을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명동골이라 불렀다.

일찍이 간도땅으로 이주해온 김약연은 장재촌에 거처를 잡고 명동학교를 꾸려 후대 양성사업에 힘썼다.김약연이 거처하던 장재촌은 그 이름부터 특이하다.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 장재(長財)라 했다는 설도 있고,울타리를 마을 밖에 세웠다 하여 장재촌이라 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장재촌을 건설할 때 조선지도를 모방하여 부락을 설계하였다 한다.부락 등의 형태를 지도 형태로 꾸며 애국심을 고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함경북도 종성 태생인 김약연은 간도교민회·간민회의 주요한 책임자로 활약하였고 1908년에는 명동학교를 세워 반일계몽운동의 요람이 되게 하였다."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바람이 불변함을 이 강산일세/4천년 역사깊은 우리 조국/길이길이 복되게 보존하려고"라는 교가에서 명동학교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룽징은 또한 안중근 의사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안중근 의사는 조선땅에서 반일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더욱 큰 투쟁을 결심하고 두만강을 건너와 명동·장동 일대에서 활동하였다.명동골은 그의 반일투쟁의 요람이었다.

이곳에 있는 선바위골 문암동에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기 위해 바위를 과녁으로 삼고 사격연습을 하였다고 한다.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안의사는 하얼빈에서 일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윤혜정 작사·조두남 작곡의 '선구자'노래는 1920년대 옌볜 조선족 가운데서 애창되던 노래다.광복 전에는 '룽징의 노래'라고 하였다.

룽징에서 서쪽으로 3㎞쯤 가면 비암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북쪽 산 위에 정자 하나가 하늘을 이고 서 있다.그곳이 바로 '일송정'이다.일송정은 원래 비암산 북쪽 벼랑 꼭대기에 소나무 한그루가 푸르름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는 것이 마치 정자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0년대 일송정은 많은 독립지사들의 마음의 기둥이었다.민족의 독립을 호소하는 '선구자'에서도 "일송정의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는 비유로 독립운동가들의 조선독립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였다.

일송정에 대한 조선인들의 찬송이 높아가자 일제는 안절부절 못하였다.그랬건만 일송정은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도 더욱 싱싱하게 자랐다.악에 바친 일제는 한밤중에 군사를 파견하여 일송정 원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안에 후추씨를 밀어넣고는 대못을 박아 봉해버렸다.

그후 일송정은 그때부터 시들기 시작하더니 1938년 이르러서는 영영 말라죽게 되었다.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어느덧 50여년.지금은 룽징의 몇몇 인사들에 의해 소나무 한그루가 옮겨 심어졌고 또 정자도 만들어져 당시의 그 역사가 새롭게 기억되고 있다.

룽징은 조선민족에게 유서깊은 역사의 땅이다.1백여년 전 우리 민족에 의해 개척돼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이룬 곳임은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 조선족에게도 마르지 않는 자긍심의 원천인 것이다.

안화춘<중국 옌볜사회과학원 연구원>

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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