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랭보, 백석 … 그들을 불러내 묻고 답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승희(58) 시인이 “정신이 은화처럼 맑은 날 뵙고 싶었다”고 하자 이상(1910∼37)이 답한다. “요즈음엔 정신이 은화처럼 맑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달러 환율의 지그재그에 따라 모든 것이 혼탁하게 요동치고 있잖아요.” ‘은화처럼 맑은 정신’ 운운은 이상의 대표 단편 ‘날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가 복거일(64)씨가 부인에게 소홀했던 점을 지적하자 조지 오웰(1903∼50)은 “좋은 작품을 쓰려면 마음에 무자비한 면이 있어야 한다. 다른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밀려난다”고 대답한다.

진작 고인이 된 국내외 문인과 현역 활동 중인 문인 사이의 가상 문답을 엮은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중앙북스)가 나왔다. 국내 문인 25명이 평소 만나고 싶었던 선배 문인을 인터뷰한 25꼭지를 모았다.

소설가 정영문은 카프카를, 평론가 김윤식씨는 시인이자 평론가 임화를, 시인 김기택씨는 김종삼 시인을 가상 인터뷰했다.

지난해 세상을 뜬 장영희씨는 허먼 멜빌의 장편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헤브 선장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선배의 문학세계, 작가정신에 대해 후배들이 바치는 오마주(존경)이면서, 선배 호출을 통해 오늘을 점검해 보려는 일종의 기억 행위이다.

각 인터뷰는 길지 않다. 10쪽 안팎 분량이다. 인터뷰어에 따라 강조점이나 색깔이 다르다. 평론가 고형진씨의 백석 편은 모국어의 확장에 기여했으면서도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보였던 백석 문학세계의 압축 파일 같다. 교양적이다.

박형준 시인의 아르튀르 랭보(1854∼91) 편은 랭보 시 세계의 핵심 대목에 육박한다. 박씨는 죽기 직전 1891년의 랭보를 찾아간다. 랭보의 입을 통해 이른바 ‘견자(見者)의 시론’을 끌어낸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사실은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어떤 모델을 따르는 일 없이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란, 곧 뒤틀림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전복할 때 시인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육성(肉聲) 형식으로 옛 문인을 만나는 게 책의 매력이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