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경기 부양보다 구조조정을 제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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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의 경기 급냉은 불안감에 따른 심리적 측면이 강하다.따라서 섣불리 돈을 풀기보다 구조조정을 착실히 진전시켜 불안심리를 가라 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대규모 실업사태를 막기 위해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사회간접시설 투자 확대등 재정기능을 활용하도록 하자.”

본지가 내년 경제운용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경제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나타난 다수의견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경제여건이 올해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 공감했다.특히 최근 소비나 투자 등 내수부문의 경기위축이 지나치게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도 견해를 같이 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내년에 이같은 내수 위축에 쫓겨 인위적인 부양책을 쓰기보다는 구조조정을 확실히 진행시켜 중장기적인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키워가는 정공법을 택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경기가 너무 빨리 위축될 경우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정부가 나서 돈을 풀어야 한다는 소수의견도 제시됐다.

내년도 경제운용계획을 짜고 있는 정부도 고민에 빠져 있다. 돈을 풀거나 세금을 깎아주는등의 부양책을 썼다가 실패하면 경기침체와 인플레가 겹치는 스테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의 물가상승)이 올수도 있고, 안쓰자니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실업 급증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소비·투자 급랭,심리적 위축이 문제=소비와 설비투자는 수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최근 급제동이 걸리고 있다.소비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연간 12.7%가 줄었다가 올 1분기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늘어나는등 가파른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지난 9월에는 증가율이 6%대로 뚝떨어졌고,이같은 증가율 둔화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설비투자 역시 올 1분기에 전년동기에 비해 57% 늘었으나 9월에는 증가율이 18%대에 그쳤다.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이같은 소비·설비투자 위축은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높아진 경제성장률로 인한 착시현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며 “단순 계산으로 지난 3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4%대에 불과했고,내년에는 잠재성장률에 근접한 5%수준으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기업·금융구조조정의 지연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까지 가세해 수요위축이 실제보다 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언제 잘릴찌 모르고 기업환경이 불투명한데 누가 소비나 투자를 하겠냐는 얘기다.(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수석연구위원)

◇정부가 돈풀때 인가=경기 급냉을 이유로 돈을 풀어서라도 소비나 투자를 살려야 한다는 의견은 아직 반대가 많았다.

우선 재정자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기에는 정부 빚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이미 1백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금융권에 들어가 있는데다 추가로 40조원을 투입할 계획인데,그 부담이 엄청나다.

내년과 2002년에 갚아야 할 정부보증채의 이자와 국채, 국·내외차입금이 각각 26조원에 달한다.또 공적자금 원리금 상환이 본격화 돼는 2003년과 2004년에는 그 규모가 39조5천억원과 33조8천억원으로 늘어난다.여기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시행등으로 돈 쓸곳이 많은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점을 감안,재정지출 총액을 늘리기 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연금·의료등 복지정책을 수정,사회간접자본(SOC)투자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고려대 이만우 교수,LG투자증권 김주형 상무).

정부 지출을 늘리는데 따른 물가상승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더우기 국제유가가 떨어지는 추세지만 배럴당 25달러를 웃돌 전망이 우세한 만큼 인플레를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는 얘기다.

금리를 더 낮춰 투자를 자극해 보자는 저금리 정책은 이미 오래전에 한계를 드러낸 만큼 반대의견이 많았다.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자금난을 덜어주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지속적인 저금리 정책을 써왔지만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등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같은 저금리 정책이 소비와 투자의 거품을 조장한 측면까지 있다.당초 적절한 금리정책을 통해 올 성장률을 7∼8%로 조정했더라면 내년중 체감경기가 크게 위축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금융연구원 정한영 경제동향팀장)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금융쪽에서는 돈을 풀만큼 풀었으니 더풀기는 곤란하고,투자심리를 살리려면 기업구조조정을 제대로 하는 수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분석이다(한국은행 이성태 부총재보).

◇실업이 문제다=구조조정과 실업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구조조정에 속도가 붙을 수록 실업에 대한 부담은 커질 것이다.

다만 외환위기 이후 한때 실질자가 1백78만명(실업률 8.6%)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직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고, 내년 1분기 혹은 상반기를 고비로 실직자의 증가는 주춤해질 것이라고 재경부 관계자는 전망한다. 그러나 정부가 예상하는 1백만명대의 실업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은 구조조정 기간에는 일정한 실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일시적인 실업해소대책을 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편다. 그보다는 현재 마련돼 있는 실업보험이나 재취업교육등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수 있도록 뒷받침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안동원 키움닷컴 증권 이사).

소수의견이지만 과감한 재정지출로 실업에 대처하자는 의견도 있다.정부가 공언한 2003년 균형재정에 구애받지 말고 실업자 생계지원등에는 돈을 아끼지 말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이화여대 경제학과 전주성 교수).

◇구조조정 만이 살길=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역시 구조조정의 착실한 이행이 내년 경제운용의 핵심솨제라는 것이다. 내수의 급격한 위축은 그간의 급성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섣불리 경기부양을 하기 보다는 구조조정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동원경제연구소 온기선 이사).

또 내년에 유가.환율등 비용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이 큰 만큼 경기부양을 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붇는 격이 될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전사태에서도 나타났듯 구조조정,특히 노동조합을 대하는 원칙을 세우고 지켜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앞으로 공기업 파업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고,내년 봄 대규모 연대투쟁으로 이어질 경우 시장은 또한차례 혼란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노조의 요구중 합리적인 것은 수용하되 구조조정의 큰 원칙을 거스르는 요구는 분명하게 차단하는 등 정부의 일관성있는 정책과 집행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제부

◇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고영선 KDI연구원, 김경록 미래에셋투신운용 이사, 김주형 LG투자증권 상무, 배상근 산업연구원 수석연구원, 안동원 키움닷컴증권 이사, 온기선 동원경제연구소 이사, 이만우 고려대 교수, 이성태 한국은행 부총재보,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정한영 금융연구원 경제동향팀장,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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