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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중계권만 4조1300억원, 세계 200개국 5억 인구가 시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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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22면

1일(한국시간) 열린 맨유-아스널 경기는 최초로 3D로 중계됐다. 런던의 한 펍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축구팬들. 런던 로이터=연합뉴스

대영제국은 한때 전 세계 4분의 1을 지배했다. 아프리카ㆍ북아메리카ㆍ남아메리카ㆍ아시아ㆍ오세아니아에 유니언 잭이 펄럭였다. 런던에서 저문 해는 인도의 델리에서 다시 떠올랐다. 대영제국은 사라졌지만 축구에서는 다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축구계에서 현대판 대영제국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스포츠는 월드컵도, 올림픽도, 포뮬러원도, 미국 메이저리그도 아니다. EPL이다. 2008~2009 시즌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5억 명 이상이 EPL을 시청했다.

EPL, 해가 지지 않는 축구제국

위기… 변화의 출발점
1980년대 말 잉글랜드 축구는 불황의 늪에 빠진 영국 경제만큼이나 암울했다. 운동장은 낡았고, 훌리건은 점점 악랄해졌다. 85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잉글랜드)의 과격한 팬들이 유벤투스(이탈리아) 서포터를 공격했다.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했다. 이후 5년간 잉글랜드 클럽팀은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경기력도 동반 하락했다. 징계가 풀리기 전인 89년 또 비극이 발생했다. 셰필드 힐스브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잉글랜드 FA컵 4강전에서 팬들이 엉켜 넘어지며 96명이 목숨을 잃었다. 축구장에는 광기와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축구팬’이라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주식회사 프리미어리그 탄생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888년, 잉글랜드에서는 풋볼리그가 시작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리그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1992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1부 리그 팀은 새로운 리그(EPL) 창설을 결의했다. 명분은 뚜렷했다. 폭력으로 얼룩진 축구 문화를 일신해야 했다. 또 수준 높은 리그를 통해 경기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하지만 ‘주식회사 EPL 창설’이라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건 사실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기존 체제에서는 1~4부 리그 92개팀이 중계권료를 균등 배분했다. 맨유ㆍ리버풀 같은 인기 구단이 이름도 알기 힘든 4부 리그 최하위 팀과 똑같이 대접받았다. 중계권이 푼돈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86년 2년간 630만 파운드(약 120억원)에 불과했던 중계권료는 88년 4년간 4400만 파운드(약 836억원)로 껑충 뛰었다. 힐스브러 참사 후 정부의 압력과 재정 지원으로 운동장 환경도 크게 개선됐다. 인기가 높은 구단이 주도하는 ‘혁명’의 기운은 점점 무르익었다. 결국 92년 잉글랜드축구협회(FA)에서 독립해 중계권과 후원사를 별도 관리하는 EPL이 태어났다.

TV와 함께 성장
TV로 EPL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빠를까”라고 감탄한다. “EPL을 본 뒤부터 하품 나는 K-리그를 못 보겠다”는 팬도 적지 않다. 지난해 9월 볼턴에서 이청용을 만났다. 빅리그에 입성해 적응 과정에 있던 이청용은 “한국에서 TV로 볼 때는 과연 내가 EPL 스피드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실제 경기를 치러 보니 K-리그와 별 차이가 없다. 절대로 TV에서 보이는 것처럼 빠르지는 않다”고 말했다.

EPL은 출범하면서 영국 스카이TV에 독점 중계권을 줬다. 이는 매우 위험한 결정으로 보였다. 스카이TV는 돈을 지불해야만 볼 수 있는 위성 페이TV였기 때문이다. 스카이TV를 소유한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은 5년간 중계권료로 무려 3억400만 파운드(약 6460억원)를 질렀다. 머독의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독점적인 EPL 중계권 덕분에 위성TV는 빠르게 영국 시장을 점령했다. 시청자 수가 곧바로 수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멋진 화면을 잡기 위한 투자도 활발했다. 중계 기술에서 EPL은 K-리그는 물론 스페인ㆍ이탈리아리그와도 비교가 안 된다. EPL은 1일 맨유-아스널 경기를 3D로 중계했다. 세계 최초다.

스카이TV의 독점은 2006년 세탄타스포츠가 중계 대열에 가세하며 끝이 났다. EPL은 하이라이트·녹화방송·라디오중계권까지 쪼개 팔며 수익을 증대해 나가고 있다.
2008~2009 시즌 EPL 전 경기를 안방에서 지켜보기 위해 영국 축구팬은 매달 최소 45파운드(약 8만5000원)를 지불해야 한다. 또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을 통해 보려면 매달 6파운드(약 1만1400원)를 내야 한다.

세계를 집어삼키다
대영제국은 식민지로부터 면화 등 각종 원료를 싼값에 사들인다. 뛰어난 방직 기술을 바탕으로 고급 옷감과 의류를 생산한다. 식민지는 다시 이를 소비하는 시장이 된다.
EPL 작동 원리도 비슷하다. EPL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유망주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중 한 명인 박지성의 연봉은 73억원이다. 거액이지만 박지성 덕분에 맨유와 EPL이 거두는 수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2007년 여름 맨유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아시아 투어를 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맨유는 금호타이어와 4년간 140억원에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얼마 후 서울시가 스폰서가 되고 싶다며 30억원 가까운 돈을 들고 제 발로 맨체스터를 찾아갔다. 지난해까지 EPL 중계는 MBC ESPN이 했다. 올해는 포기했다. 연간 100억원에 이르는 중계권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EPL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MBC ESPN 대신 SBS스포츠가 새 파트너가 됐다.

EPL의 세계화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자국 리그가 성숙하지 못한 대륙에서는 EPL에 유망주와 팬들을 동시에 빼앗기고 있다. EPL이 살찌는 만큼 자국 리그는 황폐해지기 일쑤다. 중국과 말레이시아에서 EPL의 인기는 도박산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맨유와 첼시 두 EPL 팀이 격돌한 2008년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후 양팀 서포터가 충돌해 7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최고의 선수→최고의 성과→최고의 수익이라는 선순환 구조만 가능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지휘 아래 영원히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꿈이 대공황으로 산산조각 난 것과 똑같은 일이 EPL에서도 생길 수 있다. EPL 중계권 수익은 20개 구단에 고루 배분된다. 성적과 중계 횟수 등을 감안해 차등 분배하는데 구단마다 평균 4600만 파운드(약 874억원) 정도를 받는다. 하지만 20개 팀 가운데 18~20위 3개팀은 EPL에서 하위 리그인 챔피언십리그로 강등된다.

챔피언십리그는 평균 중계권료가 100만 파운드(약 19억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EPL에 잔류하기 위한 경쟁이 우승 경쟁만큼 치열하다. 과열 경쟁 때문에 선수들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과잉 투자는 재정 압박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터진 금융위기는 EPL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은행으로부터 빚 독촉을 받는 EPL 구단이 적어도 3~4곳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잉글랜드 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는 로드 트리즈먼은 “EPL 20개팀 총부채가 20억 파운드(약 3조80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맨유ㆍ리버풀ㆍ아스널ㆍ첼시 등 빅4의 빚이 전체의 3분의 2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했다.

맨유는 부채 상환을 위해 홈 구장 올드 트래퍼드 매각도 고려하고 있다. 포츠머스는 부도 직전에 몰렸다. 지난해 11월 이후 선수들의 임금 지급이 지연되고 있다. EPL이 호황일 때 몰려든 외국인 자본이 일거에 빠져나가면 거품이 일거에 꺼질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도 있다.

충성도 높은 팬들이 원천 경쟁력
잉글랜드에 가 보면 왜 축구 클럽과 홈구장이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한국적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우승하는 것보다 자신이 응원하는 지역 클럽이 EPL 챔피언이 되는 걸 보고 싶다는 팬들이 적지 않다. 잉글랜드 대표팀보다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응원해 온 지역 클럽이 훨씬 더 친근해서다. 이런 팬들이 있었기에 EPL의 탄생과 발전이 가능했다.

호날두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것을 두고 축구 시장의 헤게모니가 스페인으로 이동했다는 해석이 있다. EPL이 어떻게 새로운 활로를 찾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EPL이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다. 외국인 자본과 외국인 선수·감독이 떠나도 ‘축구가 인생’인 잉글랜드 팬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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