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관파천 주역 이범진, 이국 땅서 의로운 죽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2호 31면

이범진 공사와 아들 이위종.

“친애하는 황제 폐하.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기셨습니다. 신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晉:1852~1911)이 고종에게 남긴 유서다. 그는 1911년 1월 13일 낮 12시,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매달아 자결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들어 있다.

병인양요 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경하의 서자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 미국특명전권공사를 거쳐 1901년 3월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됐다. 을사늑약 후 일본 외무성이 한국 공관들을 폐쇄 조치했으나 이 공사는 끝까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밀사 이준과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를 찾았을 때 이범진은 탄원서 작성을 도왔고 둘째 아들 이위종을 통역으로 동행시켰다. 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에 다닌 이위종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를 구사하는 최고의 엘리트로서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벳과 결혼했다. 훗날 생활고와 울분에 시달리던 이위종은 엘리자벳과 이혼한 뒤 독립운동에 전념했지만 러시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를 떠돌던 그는 행적이 묘연하다.

고종은 전주 이씨인 이범진 공사를 조카라고 부르며 ‘짐이 죽은 뒤에도 러시아에 남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편지를 보낸다. 이 공사는 조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이 끊긴 뒤에도 비서와 함께 어렵게 생활하면서 조국 독립을 도왔다. 항일 언론의 모태 ‘해조신문(海朝新聞:주필 장지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되자 지원금을 보냈고 연해주 의병 투쟁 조직 ‘동의회’에 1만 루블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재를 정리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냈다. 미주 지역과 하와이, 연해주 등을 가리지 않았다. 장례비로 5천 루블만 남겨 둔 상태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범진 공사는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긴 친러파로 낙인이 찍혀 있다. 하지만 그가 택한 의로운 죽음은 책임 있는 관료의 전범(典範)이자 그의 허물을 상쇄해 주는 행적이다. 『주역』 ‘대과(大過)’괘 효사에 ‘과섭멸정(過涉滅頂)이니 흉하나 허물이 없다’고 했다. 목숨은 하나다. 범속한 소인들은 목숨에 연연하지만 대인은 죽음 앞에서도 떳떳한 도리를 생각한다. 나라를 빼앗기는 암흑의 시대를 만나 물에 빠져 죽는 처지에서도 그는 허물없는 군자의 삶을 택했다. 59세 때였다. 조선 왕조가 망했지만 책임 있게 행동한 지도층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국치 100년을 맞아 우리가 이범진 공사의 죽음을 기려야 할 이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