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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이끌어 낸 화두, 지난한 손놀림으로 빛을 얻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2호 07면

‘검은 보라빛 바다의 중심 (Core of Deep Purple Ocean)’, Colored solid epoxy on acrylic , 72 55㎝

때는 IMF 직전. “인생의 본문을 다 써 버린 것 같다”고 느낀 한 주류회사의 50대 이사가 어느 날 노란 우비를 입은 여인의 뒤태에 홀린 듯 따라나선다. 남자의 삶은 그렇게 일상의 궤도에서 훌쩍 이탈한다. 파국.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쫓는다. 생명의 땅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죽음의 북극해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엔 쾌락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넘실댄다. 작가 박범신(64)의 소설 『주름』이다.

회화·조각·설치 등 40년 관록의 여류 작가 안종연(58)이 이 소설에서 화두를 길어 올렸다. 그리고 3년간 공들인 60여 점의 노작을 내놨다. 전시 제목엔 ‘주름(wrinkle)’이 아닌 ‘홈(groove)’이란 단어를 썼다. 시간의 흐름을 넘어 깊이까지 담겠다는 의도다. 그가 추출한 화두는 모든 소멸과 생성의 공간인 검은 보랏빛 바다의 중심에서 시작된다.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의 고혹적인 검은 보랏빛에 작가는 초자연적 신비를 담아내고자 했다.

바이칼호 부근에 사는 부랴트인들이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는 영(靈) 에전(ezen)은 컬러 스테인리스 스틸 판재에 무수한 전동 드릴로 쪼아 표현했다.
“북극해의 심해에 깃들어 있는 금강석처럼 고요한 세계”는 흰 모래 위에 영롱한 빛이 아롱대는 형형색색 구슬 전구로, “놀을 받아 그야말로 황금빛 비늘을 수천, 수만 매단 것처럼 반짝거리는” 청량한 바이칼 호수는 수차례 쏟아 부은 에폭시에 스왈로브스키 가루를 뿌려 형상화했다.

“시간은 너무 잔인해서 본질적인 재생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북극은 끝이 아니라 지구의 중심이야… 죽음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라는
여주인공의 독백에 대해 안 작가는 “매 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사단법인 문학사랑과 대산문화재단이 2004년부터 진행해 온 ‘문학과 미술의 만남’ 그 20번째 전시다. 13일부터 15일까지 설 연휴에는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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