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모으다 보니 10만 권, 책 사느라 빌딩 두 개 팔았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2호 08면

책을 좋아하는 건 큰 골칫거리를 하나 안고 사는 일이기도 하다. 웬만한 장서가라면 이사는 엄두를 못 낼 만큼, 책이란 놈은 지성의 무게뿐 아니라 물리적 무게와 부피로 자리를 차지하니 말이다. 화봉갤러리·화봉문고 대표 겸 화봉책박물관 관장인 여승구(74)씨는 그런 책을 10만 권 넘게 소장하고 있다. 서울 도심의 빌딩 두 개를 책 사느라 날려 버렸다니, 그의 책 사랑은 차마 ‘취미’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화봉갤러리 여승구 대표

외국 서적을 수입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1982년 서울 북페어를 개최하면서 수집가였던 윤석창씨가 소장한 문학책 초판본 200권을 인수해 전시했다. 전시가 끝나고 경매에 책을 내놓던 날, 언론사 문화부장단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 모 부장이 “문학박물관이나 차리지 뭘 팔아?”라고 한마디 툭 던졌다. 다음 날로 경매를 유찰시켰다.
“내가 문학소년이었소. 중학생 때부터 시를 썼어요.”

문학에 대한 순정으로 시작했지만 모으다 보면 욕심이 생기는 법. 그는 “수집은 블랙홀”이란 말을 몇 차례 되뇌었다. “원래 뭘 버리지 못해요. 셔츠만 수백 장이지. 나란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떡해.”20년간 성장해 온 회사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새 책 팔아 헌책을 사니 별수 없었다. 2004년 무리를 해 서울 신문로에 화봉책박물관을 열었지만 기대만큼 사람은 오지 않았다. 환율이 미친 듯 올라 환차손을 떠안으면서 고통은 더 커졌다. 신문로 빌딩을 정리하고 2008년 인사동의 모란갤러리를 인수해 화봉갤러리로 바꿨다.

갤러리에선 세상에서 제일 큰 책과 작은 책 등을 상설 전시한다. 대관 비수기인 1, 2월과 7, 8월엔 기획전을 연다. 지금은 ‘추사(秋史)를 보는 열 개의 눈’이 전시 중이다. 갤러리를 먼저 둘러보고 화봉문고로 자리를 옮겼다. 고서가 빽빽이 꽂힌 서가, 오래된 책에서만 나는 독특한 향내에 압도됐다. 그는 외국 서적 수입 일은 아들에게 넘기고 고서적을 거래하는 화봉문고만 운영한다. 고서적상이라지만 고활자로 찍은 책, 고지도, 문학서적, 교과서, 고판화, 고문서는 팔지 않고 모으기만 한다.

서가엔 세계 각국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500종에 달하는 『춘향전』, 옛날 교과서, 고지도 등이 그득했다. 그럼에도 책 수집가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는 『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된단다. 오래전 일본에서 책값 1만 달러가 담긴 지갑을 택시에 놓고 내린 탓이다. “세계 3대 미서 중 하나로 꼽히는 『단테 전집』이 지난해 불황을 틈타 미국에서 10만 달러에 매물로 나왔는데 못 샀다”는 말에도 회한이 묻어났다.

한스러운 게 그것뿐이랴.“일제시대 경매 목록을 보면 국보급 도자기, 서화와 책이 같은 값으로 매겨졌어요. 해방 후 책값만 점점 내려갔죠. 한문 전공자를 빼곤 교수도 고서를 읽지 못하고, 외형적이고 현시적인 것에 치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죠. 도자기야 1억원짜리라고 하면 ‘와’ 하겠지만, 책은 감상용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걸 감안하고도 한국에서 고서는 너무 무시당해요.”우리나라는 고인쇄술의 종주국이었다. 최고(最古)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우리 것 아닌가.

“금속활자는 특히나 놀라운 발명이죠. 필사나 목판이 아날로그라면 활자는 디지털이에요.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세계적 그룹이 그냥 나타난 게 아니에요. 우리에겐 세계 최초를 만든 창의력의 피가 흐르는 겁니다. 한국의 인쇄술에 중국의 제지기술이 독일의 마인츠에 상륙해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을 탄생시켰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판은 봉건 왕정 유지용이었어요. 국가가 통제하니 방각본(민간출판)이 늦었죠.”구텐베르크 인쇄박물관엔 “극동에 ‘a form of steel stamp’가 있었다”고만 적혀 있단다. 우리의 금속활자는 인쇄가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우리나라에 국립 책박물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6년 문화부 장관을 만나 국립 책박물관을 만들면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중앙도서관에 기증하라는 거예요. 책은 박물관에 있어야 해요. 도서관에 가면 정물화되고 말지요. 우리가 고인쇄술의 종주국이란 걸 국가 브랜드로 삼아야 해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