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학에 학생선발 자율권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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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후진국은 통제 위주의 타율적 교육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선진국은 지원 위주의 자율적 교육정책을 펴고 있다.

사립대학 본고사 금지를 법령으로 제정한 것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온 천하에 천명했던 한국 정부가 아직도 통제만능의 교육 후진국임을 자인한 셈이다.

*** 본고사 왜 못보게 하나

수능의 변별력이 문제되고 있는 이 때에 정부가 대학의 본고사를 금지하는 법령을 서둘러 제정한 것은 규제완화와 대학의 자율권 확대를 강조해 온 그 동안의 정부정책을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수능의 변별력이 충분히 있어 선발도구로 가치를 발휘한다면 본고사를 굳이 볼 필요가 없겠지만, 본고사 실시 여부는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지 정부가 법령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능의 변별력이 없어져 수험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당국은 최상위권 학생들만의 문제일 뿐이지 전체 학생의 문제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수능 당일에 전년도 대비 평균점이 3점에서 5점 정도 하락할 것으로 수능출제위원장이 발표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채점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균점이 20점 이상 상향돼 변별력이 문제라는 입시기관들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정부는 국민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해결방안을 내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수능을 쉽게 출제하면 과외가 근절되고, 본고사를 실시하지 않으면 고교교육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주장은 과외의 번창과 공교육의 부실화로 허구임이 판명됐다.

아무리 수능을 쉽게 출제해도 과외수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시험이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과외수요는 있게 마련이다.

무려 18과목이나 이수해야 하는 고교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두고, 쉬운 수능과 대학 본고사 금지를 교육정상화 기제로 활용하려는 것은 오산이다.

과외문제가 심하지 않은 교육선진국처럼 고교 교육과정을 필수 2과목 혹은 3과목, 선택 4과목 혹은 5과목으로 총계 6과목 내지 8과목으로 대폭 축소한다면 과외수요는 줄게 되고, 학생들이 적성과 소질을 발견할 여유를 갖게 돼 공교육이 정상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능이 대학선발의 도구로 활용되려면 반드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 앞으로도 계속 정부 당국이 변별력이 없을 정도로 수능을 쉽게 출제하는 정책을 고수한다면 수능은 합격이나 불합격 판정만 하는 자격시험으로 전환하고, 각 대학에 선발자율권을 주어야 한다.

각 대학이 본고사를 보든 말든 정부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대학원의 경우 '대학원 입학 수학능력시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이 무시험 혹은 유시험으로 학생을 자율적으로 잘 선발하고 있다. 대학원생을 자율적으로 선발할 역량이 있으면 대학생도 자율적으로 잘 선발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에 선발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당장 2002년부터 사립대학의 본고사 금지를 규정한 법령을 폐기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사립대학은 그 대학이 고유하게 가진 설립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편성할 권리가 있고, 아울러 그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할 권리를 가진다.

사립대학의 교육과정 편성권과 학생 선발권리를 정부가 침해해서는 대학이 발전할 수 없음은 물론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이 퇴색된다.

*** 대학도 정부에 기대선 안돼

정부가 자율권을 보장하면 대학은 자율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비민주적인 역대 정권에 의해 오랫동안 타율에 길들여진 대학들이 이른바 국민의 정부 시대를 맞아 아직도 자율권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정부가 자율적으로 하라고 해도 눈치만 살핀다면 한국은 교육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며 이는 오로지 대학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자기 대학에서 교육시킬 학생을 자기 대학 역량으로 선발하지 못하는 대학에 무엇을 믿고 2세 교육을 맡길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정부가 해결해주길 기대하는 타율적인 대학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대학의 발전은 물론 이 나라 교육의 선진화는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이 교육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부는 물론 대학이 창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권대봉. 고려대교수·한국인력개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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