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능력껏 분수껏 살자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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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우리 사회의 병폐 중 하나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시인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풍조다. 사과는커녕 변명하고 오히려 옳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살을 하는 마당에 쓴 유서조차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결백을 거짓 주장하는 판이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상식과 합리성이 사라지고 가치관 혼란을 일으키는 해괴한 풍조다. 그 유사한 징후를 최근 쉬운 수능출제로 혼란이 일고 있는 대학입시 문제에서 또 보고 있다.

***혼란 부추긴 쉬운 수능

시험이란 크게 보면 두가지다. 자격시험과 선발시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이름은 미국식 입학자격시험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겐 사실상 선발시험이다.

지난 5년간 분명히 선발고사 기능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 시험이 변별력이 없을 만큼 너무 쉽게 출제돼서 혼란이 일고 있다. 대학에 가야 할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교사까지 혼란스러워하고 학생을 뽑아야 할 대학이 큰일이라고 하는데 정작 출제를 책임진 쪽에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우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 점을 관계당국이 사과하고 사후대책을 세워야겠지만 사과 한마디 없다. 오히려 큰소리 친다. 수능이 상위 5% 또는 3%의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이 쉬울수록 학교교육이 잘된다는 기막힌 주장이 나오고, 대학이 별도의 지필고사라도 봐야겠다고 하니 이를 아예 법으로 금지시키면서 어기는 대학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출제위원 모두가 교육자다. 출제를 관장한 평가원이나 교육정책을 책임진 교육부 모두 교육전문가 집단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력을 키우기 위해 교육을 한다. 잘잘못의 비판력을 키우고 창의성 있는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르면서 대학을 가는 것이다. 그게 수능시험의 기본취지다.

그런데 어째서 출제측은 비판력.판단력.창의력도 상실한 채 잘잘못도 구별 못하고 엉뚱한 소리, 잘못된 대책만 내놓고 있는가. 이러고도 우리 교육이 잘될 수 있는가. 이런 혼란이 이번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내년부터는 수능결과마저 무시한 대입제도로 바뀐다. 다른 평가자료 없이 무턱대고 시험은 곧 죄악이라는 발상으로 유일한 통로마저 막은 채 입시를 치른다는 것이다.

80만명의 입시생이 한구멍으로 몰려드는데 나갈 길은 막혀 있다. 어쩔 셈인가.

길은 두 가지다. 단기적으로는 수능시험을 종전처럼 변별력 있는 1차 평가자료로 삼고 여타 자료는 대학에 평가를 맡기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외줄서기뿐인 교육체계에서 그나마 학교 교육과 입시의 형평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통로가 이 길이다.

2005년 미국식 수능 2단계 방식으로 개편될 때까지는 변별력 있는 수능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입시통로의 다양화다. 중학교까지는 법정 의무교육이다. 고교진학부터 적성과 취미에 맞는 특성화고교로 학생을 빼돌려야 한다. 이 정부 들어서 가장 잘한 교육정책 중 하나가 특성화고교의 활성화다. 하남시의 애니메이션고, 부산 해사고, 평택 관광고, 대구 달성 정보고, 시흥의 조리과학고처럼 특성화고교를 더 활성화해서 능력과 분수에 맞춰 진학을 유도하는 입시 채널의 다양화가 절실하다.

***특성화高 활성화 바람직

또 실업고의 전면 개편으로 지식정보 산업에 맞는 인력을 육성하고 취업이 잘 되게끔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실업고.특성화고.특목고 등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고교 학생의 절반이 그쪽으로 수용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일반고교는 선진형 순회식 교육이나 심화교육을 받을 여력이 생길 것이다. 그때는 학교 교육의 결과만으로 학생을 평가할 자료도 축적되고 수능도 자격고사와 심화교육 테스트가 가능한 수능 2단계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입시의 병목현상을 분산시켜야 한다. 대학만이 인생을 담보하는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제도와 장치를 통해 그 성공사례를 눈으로 보여줘야 한다.

수능시험을 쉽게 내고 입시제도를 수백번 바꾼다고 과외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교육채널을 통해 성실히 배우고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보여줘야 잘못된 교육체계가 바로 설 수 있다.

교육채널의 다양화를 통해 교육 욕구와 수요를 흡수하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그런 교육을 통해 능력껏 분수에 맞는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능력껏 분수껏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화된 사회, 또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후회가 없는 인생이 되는 그런 사회라야 좋은 사회 아닌가.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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