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노인에게 “버릇없다”한 39세 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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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2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법정. 아파트 입주와 관련된 민사소송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 측 변호사가 차례대로 변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이때 원고 윤모(당시 68)씨는 변호사 대신 직접 판사에게 의견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씨가 “판사님”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A판사(당시 39)는 “조용히 하세요. 어디서 버릇없이 툭 튀어나오고 있어”라며 면박을 줬다. 윤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억울한 마음에 판사에게 직접 말을 하려고 했는데 손아랫사람에게나 쓰는 ‘버릇없다’는 말을 듣고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법정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윤씨의 변호사 이모씨도 “당황스럽고 불쾌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책감에 재판 다음날 사임했다.

윤씨는 두 달 뒤 “판사에게 ‘버릇없다’는 질책을 받아 인격권이 침해됐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4일 “A판사가 윤씨에게 ‘버릇없다’고 말한 것은 인권 침해”라고 결정했다. 인권위는 “윤씨가 법정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고 판사가 재판장으로서 법정지휘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사회통념상 39세인 판사가 68세인 노인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법정지휘권도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의 권한으로 이를 국민에게 행사할 때는 헌법 10조에 규정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위 조사 과정에서 A판사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인 윤씨가 법정 예절을 알면서도 계속 재판진행을 방해해 엄하게 주의를 준 사실은 있으나 정확한 발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뒤 서울중앙지법원장은 A판사에게 주의조치를 했다. 또 법정 모니터 강화 등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의사를 인권위에 전달했다.

◆일부 판사 고압적인 태도 여전=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지난달 18일 발표한 법관평가조사를 보면 조사 대상 변호사들의 30%가 ‘판사의 고압적인 태도나 모욕’을 법원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변호사들은 재판 중에 판사가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만하지”라고 반말을 한 사례 ▶조정을 강요하며 “여기서 이런 재판하고 있기가 짜증 난다”고 말한 사례 등을 꼽았다.

현재 판사의 언행을 규율하는 재판예규 등은 없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펴낸 『바람직한 재판 관행』이란 책자를 보면 “판사는 정중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돼 있다.

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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