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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딸아, 영어공부 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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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양완아, 영어 공부 많이 해서 나중에 내 글을 영어로도 번역하고, 함께 외국 여행할 땐 통역도 하거라."

일제시대 대표적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1892~1950) 선생이 영어 공부를 독려했던 사실이 이채롭다. 위당의 딸 정양완(75.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문학 교수.사진)씨가 대학에 입학한 1949년에 들은 말이다.

정씨는 한국양명학회(회장 정인재 서강대 교수) 주최로 15~16일 열리는 '강화 양명학파 국제학술대회'에서 '나의 아버지와 세 스승'이란 특별 강연을 한다. 장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안양대 강화캠퍼스. 6.25전쟁 때 북한에 끌려가 사망한 위당에 대한 추억을 대중 앞에서 처음 풀어 놓으며 위당을 '강화 양명학파'의 적통으로 공식 자리매김하는 자리다. 02-705-8338.

"아버지를 특히 사랑한 세 스승은 학산 정인표, 경재 이건승, 난곡 이건방 입니다. 모두 강화 양명학을 아버지께 전수한 분들이지요. 하곡 정제두(1649~1736) 선생이 강화도에 한국 양명학의 뿌리를 내린 이래 300여년이 흘러 아버지에게까지 적통이 이어졌습니다."

양명학은 유학(儒學)의 한 학파로 중국 명나라 때 유행했다. 주창자였던 왕양명의 이름을 따 양명학이라 부른다.'주자학은 공리공담을 일삼는다'고 비판했기 때문에 양명학은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배척당했다. 하지만 탄압을 피해 주자학과의 절충을 모색하는 가운데 조선 후기 실학(實學)과도 연관을 맺으면서 '한국 양명학'을 꽃피웠다. 이를 '강화학파'혹은 '강화 양명학'이라 부른다. 오늘날 세계 유학의 흐름이 양명학을 새롭게 해석하며 전개되는 가운데 강화학파도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양명학은 대의명분에만 빠져 실리를 잃는 것을 비판합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하며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 최명길이 양명학자였죠. 이런 얘기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위당은 마이크가 필요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크고 낭랑해서 자녀들을 꾸짖을 땐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챘다고 한다. 끼니를 건너 뛰기가 예사일 정도로 고생했고, 지인들로부터 도움도 많이 받았다. "대학 입학금이 없어 아버지 편지를 들고 당시 서울대에 재직하던 손진태.이숭녕 선생을 찾아갔지요. 그분들이 즉석에서 월급을 덜어내 해결해 주셨어요."

정씨는 요즘 심경호(고려대 한문학) 교수와 함께 위당의 한문 저술들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다. 정씨의 남편은 강신항 성균관대 국문과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과 49학번 캠퍼스 커플로 슬하에 2남2녀와 9명의 손주를 두었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이 남동생이다.

정인재 교수는 "위당의 학맥은 민영규 전 연세대 교수와 정양완 교수에게 이어졌다"며 "가학(家學)으로 유지해 온 강화 양명학의 명맥을 한국양명학회 차원에서 계승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작업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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