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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 주민 어울려 사는 '평화의 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고려 말 우왕 때 두꺼비(蟾)수만마리가 나루터(津)에서 진을 치고 광양으로 쳐들어 온 왜구들을 울부짖어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섬진강(蟾津江). 섬진강 푸른 물길과 백사장이 내려보이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네가구씩 들어선 아파트형 주택 8동이 비둘기 집처럼 포근하게 들어서 있다.

새벽녘이면 사람이 그어놓은 영호남이라는 경계선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물안개가 아스라히 피어오르는 곳. 전남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 '평화를 여는 마을' 이다. 걸어서 15분이면 하동읍, 버스로 20분이면 광양시내여서 영.호남이 이곳 주민들의 생활권이다.

"그랑께 뭐시냐, 성님이 일을 맡아붓시요. 그라믄 우리가 뒤에서 팍팍 밀어 줄랑께 걱정마슈. "

"그래 보이소. 우리도 마 그냥 안있을 거 아잉교. "

지난달 30일 마을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하는 주민 정기모임이 열린 마을회관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여 오가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마을 현안을 해결하는 방식도 협의와 합의를 거치는 철저한 민주주의 방식이다.

한국 사랑의 집짓기운동연합회가 무주택 서민들의 내집 마련 꿈을 실현시켜 주고 영.호남 화합을 다지자는 취지에서 섬진강변에 터를 잡은 것이 지난 3월.

5개월의 준비를 거쳐 지난 8월 자원봉사자 6천여명(연인원)이 구슬땀을 흘려 가구당 방 2개와 거실.주방을 갖춘 16평형 보금자리 32가구를 만들었다.

입주자 1백20명은 영호남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사람 가운데 월소득 1백만원 이하 서민들로 결정됐다.

초대 통장 김형길(金炯吉.38.레미콘 차량 운전기사)씨는 현장을 다니느라 집을 자주 비우는 처지. 이웃 주부들이 아들(9)의 식사를 챙겨주고 숙제도 돌봐주는 엄마와 가정교사 노릇까지 해줘 이웃에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며느리는 가출하고 아들은 타향에서 살고 있어 막노동과 식당 잔일을 하면서 손자 셋을 키우는 김원근(64).서춘화(63)씨 부부. 장터에서 잡화를 팔아 아버지(80)를 부양하는 홀아비 정병균(47)씨. 새녁 5시면 우유 배달통을 들고 집을 나서는 억척 주부 김처순(37)씨. 간병인 일을 하면서 초등학생인 두 아들을 키우는 심유순(38)씨 등등.

입주자 모두가 한가지 이상의 애환은 갖고 있지만 집없는 설움을 겪어온 공통된 경험탓인지 이웃간의 정은 켜켜이 쌓여 갔다.

저녁 때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찾으러 이웃집 마을을 가는 것이 일상화된 동네. 아이 찾던 어른이 이웃집에 눌러앉아 아이와 함께 밤늦게까지 놀기도 하는 마을.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는 우순석(57)씨는 "아름다운 산과 물고기가 노니는 게 보이는 강물, 맑은 공기가 있어 도시 부자가 전혀 부럽지 않다" 며 주변 풍광을 자랑했다.

비둘기 둥지같은 집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행복한 가정과 공동체를 꾸려가는 주민들. 평화를 여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좌절을 딛고 희망을 일구는 농군과 같은 억척스러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광양=글 : 구두훈 기자

사진 : 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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