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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자학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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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역사는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자치통감' '동국병감'과 같은 많은 역사책들의 제목에 거울을 의미하는 '감(鑑)'이 들어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삶의 거울이 되는 역사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비추어야지 현재의 사회적 목적을 위해 굴절되거나 왜곡돼서는 안 된다.

물론 역사가는 관점, 즉 사관(史觀)을 갖고 역사를 본다. 이긴 자의 관점에서 지배세력 위주로 서술할 수도 있고, 억압받는 민중의 입장에서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는 과정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 서든 역사적 진실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초상화를 그릴 때 각기 특수한 관점에서 그리지만 대상인물의 본질적 요소를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매한가지다.

최근 논란 중인 '편향 교과서'는 비록 참여정부와 무관하다 해도 현 교단(敎壇)의 전반적 분위기를 전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란 점에서 충격이다. '친미 사대주의적 편향'에 균형을 잡는 일은 좋다. 문제는 균형 취하기를 넘어 반대쪽 또 다른 편향으로 치닫고 있는 점이다. 좌파 민족주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번영을 부정하는 반한(反韓)사관을 떠올리기에 족하다. 남북분단은 미국과 남한의 책임이고, 6.25는 미국과 남한이 도발했으며, 민족의 정통성은 북에 있다는 믿음을 깔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현대사를 다시 쓰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적잖은 중.고생들이 6.25를 '북침'으로 말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사학계 원로 차하순 교수는 현재적 요청을 강조하는 사관의 위험을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첫째, 역사의 이념화는 역사를 지배세력의 선전도구나 정치적 시녀로 만든다. 둘째, 특정사관에 맞게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한다. 셋째, 현재적 요청에 따라 역사는 그때마다 달리 써지고 고쳐 써져 신뢰도를 망가뜨린다. 역사 바로세우기는커녕 역사 죽이기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해석함은 자유다. 그러나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북한민중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발전은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며 여러 요소 간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이념을 앞세우면 역사에 대한 이해는 단순해지고 피상적이 된다.

북한자료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해방 이전 시기만 과도하게 강조하며 오늘의 파국은 애써 외면하는 브루스 커밍스류의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체제를 두둔하고 특정방향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재배열하기 십상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은 미국의 진보 사가들도 싱가포르.대만과 함께 '열외'로 분류해 따로 대접한다.'민족반역집단의 잘못된 역사'로 과거를 깡그리 부정하는 민중 반한 사관은 스스로에 대한 자학(自虐)이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는 고립되고 유리된 것이 아니고 세계사의 유기적 부분으로 공존한다. 국제적 관점에서 세계사와 연결지으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역사교육의 할 일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몰두하다 지난 6월 타계한 이기백 선생은 "오늘날 민족을 지상( 至上)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번지고 있다. 그러나 민족은 결코 지상이 아니다. 민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상은 진리다.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이나 민중은 파멸을 면치 못한다"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35집) 민족과 민중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누구보다 선생의 충고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변상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