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기독교 문화와 한국적 네트워크 문화의 만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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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20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든 때나 건강한 때나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귀에 익은 이 말의 기원은 놀랍게도 16세기 영국 국교회가 펴낸 기도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양의 결혼식에서는 거의 원문 그대로 쓰이고 있지요. 사실 더 놀라운 건 우리네 결혼식에서도 이를 심심찮게 들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씩 변용된 형태로 주례사에 곧잘 등장하지요.

기억하십니까?결혼 주례

웨딩드레스와 연미복을 입는 것만 아니라 주례의 주례사도 서양 결혼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우리네 주례 문화가 서양과 꼭 같지는 않습니다. 종교는 저마다 달라도, 결혼식에 성직자의 축복을 받는 것은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이 주례를 맡아, 양식화된 결혼서약·성혼선언이 아니라 장문의 주례사를 들려주는 건 적어도 서양 결혼식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우리네 결혼에서는 주례를 부탁하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예식 준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가 주례를 맡느냐를 살펴보면 결혼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좀 더 잘 드러납니다. 예컨대 주례를 서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절하는 흔한 이유 중 하나가 ‘아직 주례 설 나이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례는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어른이 할 역할이라는 시각이 있는 것이죠. 또 주례는 대개 결혼생활이 원만한 사람들이 맡곤 합니다. 과거 전통혼례에도 이런 면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승관 전 성균관제례연구위원장은 “집안에 악성괴질이 없었던 사람, 자손이 잘된 사람에게 혼례의 집례를 맡기곤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주례와의 관계도 있습니다. 결혼생활이 무탈한 웃어른이라고 낯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주례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죠. 양가 부모와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설령 신랑이나 신부와의 친분으로 주례를 부탁한 경우라도, 대개 미리 양쪽 집안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누가 주례를 서느냐를 갖고 집안 어른들 앞에서 깜짝쇼를 벌이지는 않습니다. 주례를 많이 서 본 어떤 분은 “주례를 부탁하고 간 신랑·신부가 죄송하다며 다시 찾아오는 일도 있다”고 전합니다. 부모가 미리 주례를 정해둔 것을 몰랐던 경우죠.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라는 특성이 강해졌어도, 여전히 결혼은 이처럼 가문의 일이라는 성격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주례를 맡기는 쪽만 아니라 주례를 맡는 쪽에서도 고려할 바가 적지 않습니다. 직장인 오모씨는 2년 전 결혼을 준비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각별하게 지내온 은사에게 주례를 부탁드렸는데 퇴짜를 맞은 겁니다. 은사는 그 이유로 우선 예의 ‘아직 나이가 아니다’를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제자들 중에 누구는 주례를 서주고 누구는 안 서 줄 수 없다’는 것이었죠.

주례 부탁을 많이 받는 사람들 중에는 나름의 원칙을 세워두기도 합니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도 그렇더군요. 과거 한때 국회의원은 대표적인 인기 주례였습니다. 6선 의원이니 그도 적잖은 부탁을 받았을 겁니다. 홍 의원은 “초등학교·중학교 동창의 자제, 해병대 동기생의 자제가 내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경북 영주 출신인 그는 고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고향과 군대가 그의 주례 서는 기준인 겁니다. 홍 의원은 “주례사는 짧게 하는 대신 주례를 부탁하러 왔을 때 신랑·신부에게 먼저 두 가지를 얘기한다”고도 들려줬습니다. 하나는 신부 될 사람을 향해 “신랑이 고약하게 굴면 나한테 이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꼭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라는 취지는 “무슨 재능을 갖고 태어나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만큼 살림을 잘하라”는 얘기랍니다.

사실 결혼식장의 신랑·신부는 대개 피로와 긴장으로 여유있게 주례사를 새겨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례사가 그냥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현 부산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의 주례로 90년대 초 결혼한 채윤희 대표(영화마케팅사 올댓시네마)는 “결혼식장에서 주례사를 녹음해줘서 신혼 초에 반복해서 들어보곤 했다”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결혼식 전체를 비디오로 촬영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전의 일입니다. 결혼식장에서 막 부부가 되는 이들의 귀에는 주례사가 잘 안 들어오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배려하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상대의 장점만 보라 등등의 주례사 내용은 신혼의 단꿈을 벗어나 결혼생활의 다툼과 갈등을 어느 정도 겪는 즈음에 더 요긴한 도움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주례라고 언제나 한결같이 배우자를 배려하면서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요. 우리네 결혼식은 여러 순서 중에 주례사에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합니다. 이를 통해 출발선에 선 신랑·신부와 함께 주례도, 하객도 결혼의 의미를 되돌아보자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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