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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두만강 대탐사] 10.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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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0. 조선족들 "나는 누구인가?"

백두산에 국경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1712년(조선 숙종)이다.그로부터 근 3백년이 지난 지금,그 정계비는 자취를 감추고 시멘트로 만든 계장(界樟·경계비)이 백두산 천지와 두만·압록강 발원지 일대에 세워졌다.그런 국경비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감회가 새롭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되묻곤 한다.

한글로 '조선'이라고 쓴 쪽에 발을 놓아본다.순간 이 땅이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혀있는 땅임을 가슴 뭉클하게 느낀다.내 몸을 흐르는 피는 이 땅에서 흘러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자로 '中國'이라고 쓴 쪽으로 돌아온다.순간 분명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의 정기를 마시며 자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천지도 둘,백두산도 둘,나도 둘이란다.내 마음도 계장의 양면처럼 이중적이란다.나는 이번 탐사에서 조심스럽게 두 쪽이 된 마음을 안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가며 두 개의 시선으로 한줄기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결을 타고 흐르는 뗏목군과 강가에 앉아 빨래 방치를 토닥이는 조선의 여인을 바라보면서 동행을 한 '한국인'들은 목메여 흐느끼기도 하고 갈린 소리로 인사수작도 한다.전에 없었던 남북간의 화기로운 대화의 장면을 화면에 담고 싶어 나는 부지런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지만 나는 그들처럼 그런 감동은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두만강은 눈물의 강이었다.1910년대 할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을 떠나 남부여대(南負女戴)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왔다.부패한 중국 군벌 정부의 이민족에 대한 진압,그리고 괴뢰(塊儡) 만주국 통치하에서의 망국의 설움은 그대로 눈물이 되었다.

아버지에게도 두만강은 애환의 강이었다.1984년 허룽(和龍)에서 74세의 생을 다 하실 때까지 아버지는 고향(강원도 춘천시 남면 후동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노상 한숨을 지으셨다.국경 보다 군사분계선 때문에 고향에 갈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 한을 두만강에 실어 보내곤 했다.

이제 나에게 두만강과 압록강은 혈연의 강이다.이주민 3세인 나는 이 땅에 잠든 아버지의 아들이고 할아버지의 손자다.하지만 이 시간 현재 강원도 춘천시 남면 후동리 앞산에 잠드신 증조 할아버지의 증손이기도 하다.이 몸의 피(血)의 뿌리는 한반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피를 이 몸의 혈관 속을 달리도록 밀어주는 기(氣)는 중국의 것이다.역사의 낭만에 들뜬 사람들은 잠꼬대처럼 멀리 고구려·발해의 기를 운운하기도 한다.하지만 나는 중국 땅에 태를 묻고 중국 땅의 주인으로 성장했다.이것이 나의 현실이다.

언젠가 옌볜대 정판룡 교수는 중국 조선족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시집을 온 며느리에 비유했다.그렇다면 강 건너 한반도는 '친정'일 것이고 중국은 '시집'일 것이다.친정집은 부모의 품을 떠난 딸의 현실적인 집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임연이라고 하는 여인은 지난 9월 23일자 흑룡강 신문에 쓴 '친정집과 시집'이란 글에서 "시집에서 지친 심신을 끌고 친정에 가면 친정에서는 이러저러한 말로 위안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른다.(중략)결혼한 그 시각부터 나에게 집이라고는 '시집'밖에 없었다"며 출가지외인(出家之外人)의 서러움을 그렸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백두산이 높다이 시아바이처럼 높으랴/고추후추 맵다이 시어머이처럼 매우랴"고 시집살이 고달픔을 타령에 담아 불러왔다.그것처럼 중국 조선족의 일백년 역사도 돌이키면 자욱자욱 피눈물이 고여 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중국 조선족으로 되면서 그 어떤 나라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비해 우리는 '시집'을 잘 만난 셈이라 하겠다.소수민족에 대한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한 구소련을 '사나운 시어머니'에 비한다면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을 실시해온 중국은 '무던한 시어머니'라 하겠다.

무던한 시집의 대표자였던 마오저둥(毛澤東)은 "한족(漢族)과 소수민족의 관계를 꼭 잘 처리해야 한다.이 문제의 관건은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극복하는 것이다"고 한 동시에 "지방민족주의가 존재하는 소수민족들은 응당 지방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로 시집과 며느리의 처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른바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의 실질은 자연동화정책이다.정치상 평등한 지위를 가진 민족간에 장기적으로 밀접한 경제와 문화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상호 낙후상태를 보완하고 선진적 민족의 영향을 받아 평화적으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중화민족은 역사상 90개 소수민족이 선진적인 한족에 동화되여 이루어진 민족이라고 한다.현재 중국땅에 실재하는 55개 소수민족도 장차 한족에 융합될 것이다.

이는 역사의 필연적 추세이다.벌써 많은 소수민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반세기 동안에 상당한 수준으로 한족에 동화되었다.그런 민족들은 대개 인수가 적고 문자가 없다.그리고 해외에 독립된 자기의 민족국가가 없다.말하자면 시집만 있고 친정은 없는 셈이다.

다행히 중국 조선족은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에 친정이 있다.우리는 일명 고국 혹은 모국이라고 한다.1952년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기 전까지 조선족들은 푸른 표지의 '임시거류민증'을 가진 조선인으로 북한과 문화권을 같이 했다.당시 조선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북한의 것이었고,신문이나 언론매체에서 조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임시거류민제도가 폐지되고 조선인이 아닌 '중국 조선족'으로 됐다.그래도 한동안 북한의 문화영향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 국경연안에 사는 조선족들은 강건너 조선에 가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중국에서 발행된 조선문 도서들도 대부분은 북한에서 출판한 것들이었다.

문화대혁명 전반기에 중·조관계에 잠시 구름이 끼면서 조선족들의 삶도 험악해졌다.강청(江靑)이 "소수민족의 말은 까마귀가 우는 소리와 같다"고 비난하면서 한어(漢語)를 강요하는 바람에 조선족의 문화와 교육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옌볜은 물론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자식들을 조선족학교에서 한족학교로 전학을 시키는 붐이 일기도 했다.

지안(集安)시 태왕향조선족소학교는 원래 학생이 1백명도 훨씬 넘는 학교였다고 한다.그러나 지금은 학생 20명에 선생이 여섯인 복식교육을 하는 학교가 됐다.

그나마도 중·한수교가 이루어 지고 우리 말과 글의 실용성과 위상이 높아지면서 조선족학생 수가 대폭 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전 향(鄕)에 사는 70여호 조선족들은 아이들을 예전에는 한족학교에 보냈었다는 것이다.

나는 보름 동안을 일행과 동무했다.단둥(丹東)에서부터 창바이(長白)까지 2천리 압록강 굽이굽이 물결을 거슬러 봉고차는 내처 흥분을 싣고 갔다.곳곳을 지나면서 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그 푸른 물에 때묻은 생각을 깨끗이 헹구어 빨았다.

남북정상회담은 평화적 통일의 서막을 열어놓았고 중국 조선족사회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장래의 통일된 고국은 어차피 중국대륙을 상대로 후속발전을 기할 수밖에 없다.세계의 최대 시장이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번 답사에서 드디어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던 갈고리같은 의문보호가 나의 가슴에서 녹아내렸다."나는 고국의 피와 조국의 기로 이루어진 중국 조선족이다.

기가 흐르지 않으면 피가 흐를 수 없고 피가 흐르지 않으면 육체의 기가 사라지듯이 조국도 고국도 버릴수 없는 이중성격의 중국 공민이다."

유연산<중국 옌볜작가>

사진=장문기 기자

<답사단 명단>

◇ 국내 : 신경림(시인), 원종관(강원대 교수.지질학), 김주영(소설가),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승효상(건축가), 이종구(화가), 송기호(서울대 교수.발해사), 김귀옥(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 여호규(전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고구려사)

◇ 현지 : 유연산(중국 옌볜 작가), 안화춘(옌볜 사회과학원 연구원.독립운동사)

◇ 중앙일보 : 장문기(사진부 기자), 정재왈(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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