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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현상 분야별로 분석한 '컨트롤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카오스를 혼돈으로만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컨트롤된 카오스' 라는 모순된 두 단어가 조합된 책제목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다.혼돈은 질서가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컨트롤(조정)됐단 말인가.

하지만 독일의 소장 철학자로 '트렌드 분석의 왕' 이란 별명을 지닌 노르베르트 볼츠는 질서와 대립하는 카오스 개념을 먼저 깨야 현대사회의 갖가지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카오스가 질서에서 벗어난 예외가 아니라 질서의 이면이라면서 카오스의 단점을 거둬내고 카오스와 화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카오스의 안경을 끼고 세계를 바라보라고 충고한다.여기서 카오스는 한마디로 복잡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개념이다.

부제인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 는 이 책의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 경제.정치.미학 등 복잡한 사회체계들에서 나타나는 카오스 현상들을 분야별로 분석하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는 복잡해진 사회는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 즉 휴머니즘으로는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섹스와 범죄 때문에 서구 문화가 몰락한다는 일부 지식인의 한탄이나 오존층 파괴 등 지구종말을 알리는 과학적 예상들은 볼츠의 눈에는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이 무력해졌음을 나타내는 징후들이다.

휴머니스트들이 종말을 떠들면서 불안해하는 것은 인간의 몰락 자체가 아니라 휴머니즘에 의거한 인간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 나 '기술문명에 대한 암울한 비관' 등도 볼츠의 눈에는 호들갑이다.인간.역사 같은 위대한 개념들도 결국 몰락하는 시간이 있다며 휴머니즘 자체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휴머니즘 대신 볼츠는 뉴미디어야말로 복잡한 카오스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특히 컴퓨터는 우리가 카오스로 여행할 때 타는 도구라며 '컴퓨터가 구원을 약속한다' 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휴머니즘과 고별해야 포스트모던한 세계의 동시대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원하지 않아도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과 과거의 교양있는 식자층이 디지털 시대의 문맹이 됐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책으로 대표되는 기존 문화의 사멸을 섣불리 예측하는 것도 옳지 않다.볼츠는 과학기술의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해 도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데다 책이 정보를 걸러내는 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인문교양서는 뉴미디어와 함께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전망하기 때문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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