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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TV문학관' 생의 고뇌 풀어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말 많고 일 많은 도시의 삶을 주로 다루면서 TV드라마는 어느새 '수다의 장르' 가 됐다.그런 요즘, 보기 드물게 과묵한 드라마 한 편이 찾아온다.

KBS2가 부정기적으로 편성하는 'TV문학관' 이 25일 밤 11시 방송할 '그곳에 바람이 있었네' (극본 김병수.연출 장기오)가 그것.

강석경씨가 쓴 10여쪽 분량의 짧은 소설 '석양꽃' 을 드라마로 옮긴 이 작품은 심산유곡 작은 암자에 의탁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깨달음을 얻으려 애쓰지만 몸의 병이 깊은 수도승 영명(박지일), 방탕한 생활 끝에 어머니의 강권으로 출가한 젊은 승려 동암(김준모), 사랑에 실패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여성 의선(정애리), 수십년 전 갓 태어난 아기를 본부인에게 빼앗긴 아픔을 안고 사는 중년 여성 택이네(김동주)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정면으로 풀어내지 않고 각각 잠시 스쳐가는 삽화로만 처리한다.

대신 화면을 메우는 것은 탁트인 하늘과 울창한 숲, 계곡 따라 흐르는 물이 절경을 이루는 자연이다.

극중 암자는 경북 청송군 주왕산 주왕암이지만, 세속에서 암자로 찾아들기까지의 절경은 월출산.지리산.두타산 등 제작진이 전국 각지의 산에서 찾아낸 풍경을 연결한 것이다.

압도하는 자연 속에서 인간은 화면의 일부만을 차지하는 점점이 작은 존재일 따름이다.한 차례 자살을 시도한 의선은 죽은 연인의 천도제를 올려주고 산을 내려가고, 속세의 인연에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돌아온 영명이 이후 입적했다는 내레이션 뿐 드라마 전편에 이렇다할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연출자 장기오 PD는 "요즘 드라마들이 너무 줄거리 중심" 이라면서 "줄거리가 아니라 여백을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고 말한다.

인물들의 과거를 환기하는 장면과 현재 장면의 연결이 매끈하지 않아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것이 다소 거슬리지만 탁 트인 풍광은 그동안 인간으로 꽉 찬 화면과 얽히고 설킨 인생사에 지친 시청자의 눈에 충분한 휴식공간이 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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