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3중 설움'…전세폭등·월세요구·보수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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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은지 19년째인 서울 강남의 노후 아파트(19평)에 전세살던 閔모(30.주부)씨는 최근 집주인과 다툰 뒤 평수를 줄여 이사했다.

2년전 전세 5천8백만원에 들어온 閔씨는 온수계량기와 누전차단기가 고장나는 등 곳곳에서 하자를 발견,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곧 재개발될테니 참아달라" 는 말만 들어야 했다.

그런던 중 지난달 계약이 만료되자 閔씨는 "더 살게 해달라" 고 주인에게 사정했다. 주인은 "보증금 5천만원.월세 50만원" 을 요구했고 閔씨는 금리상 전세보다 훨씬 비싸지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며칠 뒤 주인은 다시 말을 바꿔 보증금 4천만원.월세 75만원을 요구했다. 閔씨는 "집없는 사람이 무슨 죄인이냐" 며 집주인에게 항의한 직후 이사를 결심했다.

서울 노원구 17평 아파트에 살던 崔모(37.회사원)씨는 지난달 말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1998년 초 3천5백만원이던 전세금이 최근 5천6백만원으로 뛰어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결혼 후 12년간 단독주택 전세를 전전하다 겨우 아파트로 왔는데 2년 만에 다시 주인과 함께 사는 단독주택으로 가게 됐다" 고 속상해 했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세난이 가중되면서 세입자들이 전셋값 폭등과 전세의 월세 전환 압력, 집주인의 수리 거부 등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다.

내집마련정보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평당 3백27만원이던 서울의 평균 전셋값은 지난달 평당 3백77만원으로 뛰었다.

또 시중 금리가 떨어지면서 지난해 말 전체 서울시내 임대매물의 5%에 그쳤던 월세 비율이 이달 초 50% 수준으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올들어 매달 1천여건의 임대차 상담 중 하자 보수 관련 문의가 50여건이다.

민법은 '임대인은 임차인과의 계약 존속 중 그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 고 명시, 세입자는 주인에게 집 수리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법대로' 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요즘 세입자의 처지다.

서울 서초구 아파트의 월세 입주자 金모(27.여.회사원)씨는 지난달 "화장실 변기와 문을 고쳐달라" 고 요구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집주인은 "들어올 사람이 많으니 싫으면 나가라" 고 짜증을 내더라는 것. 대한법률구조공단 구조부장 신성식(申成植)변호사는 "전세의 경우 법적 보호조항이 잘 갖춰져 있으나 월세는 상한선 규정 등이 전혀 없는 상태" 라며 조속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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