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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지나 지하실로 … 경쟁은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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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새해 초부터 이마트가 파격적인 가격인하로 대형마트 시장에 파문을 낳고 있다. 경쟁업체들은 당황하면서도 우선 가격인하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웃지만 일부에서는 납품업체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이마트의 가격인하는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이 전투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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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이마트에서 가격인하를 실시하자 정육코너에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1월 7일 조간신문에는 소비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광고 지면이 등장했다. ‘2010년 이마트 선언, 혁명적 가격정책을 시작합니다!’라는 문구 아래 2개 면에 걸쳐 삼겹살, 즉석밥, 세제, 우유, 계란 등 12가지 핵심 생필품에 대해 4%에서 최대 36%까지 가격을 내린다는 내용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이마트 가격 인하, 지속 가능한가? #가격인하로 이익 커지는 납품업체 있느냐가 지속의 관건

소비자들은 반색했다. 서울 왕십리 이마트에서는 하루 100㎏ 하던 돼지고기 삼겹살이 1800㎏까지 수직 상승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가격전쟁 후 휴전하던 예전과 달라

경쟁업체는 곧바로 “‘동일한 가격’ 혹은 ‘더 싼 가격’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이마트발(發) 가격인하 경쟁은 2주가 지난 지금까지 품목을 추가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대형마트의 가격인하 경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대형마트가 막 등장하면서 이마트가 최저가격 보상제로 가격인하 경쟁을 했고, 이후에도 거의 해마다 대형마트들은 ‘가격인하’나 ‘365일 최저가격’ 등을 내세우며 가격경쟁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가격인하는 경쟁업체, 경쟁 상권에 있는 점포보다 싸게 팔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제품의 원가나 수급, 판매량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경쟁업체와의 가격경쟁만 있었던 것이다. 혹은 특정 계절에 수요가 늘어나는 상품이나 특정 시기에 공급이 늘어나는 제품을 대량으로 확보해 싸게 팔아 ‘할인점’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돼 있었다. 가격인하 경쟁은 초기에 급격히 진행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소진된 양쪽 업계가 서로 자제하는 방식으로 휴전을 하곤 했다.

대형마트나 납품업체 모두 손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휴전이 성립되면 가격도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이마트의 가격인하는 여느 때와 좀 다르다. 최소 1개월, 최대 1년까지 지속적으로 인하된 가격에 제품을 판매한다는 방침이다.

계절상품이나 1주일, 2주일 등 단기간에 한정된 물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체 마진을 줄이고, 매입 규모를 늘려 원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가격을 끌어내리겠다고 설명했던 것. 이마트는 이를 두고 “짧게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길게 보면 3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고 밝혔다.

또 마진이 줄어 올 한 해 영업이익이 1000억원가량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겠다고 덧붙였다. 신세계 관계자는 “마진은 줄어들지만, 가격이 싼 곳으로 인식되면 고객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박리다매’ 전략을 쓰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이 미국의 크로거 사례를 연구하는 등 할인점업을 재정의한 결과다.<22쪽 박스기사 참조>

부동의 업계 1위인 이마트가 이렇게 공격적인 정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마트 측 설명대로라면 “경쟁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대형마트업(業)의 본질을 회복하고, 할인점의 본래 기능을 되찾아 시장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대형마트들은 그동안 매장이 계속 늘면서 백화점이나 온라인 쇼핑몰, TV홈쇼핑 등 다른 유통업태에 비해 매출이 둔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특히 온라인 쇼핑몰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뒤지면서 고전했다.

매출 급등 조짐 … 분위기는 엇갈려

이에 이마트는 양질의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업태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10년 뒤에도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 부회장이 신년사에서 “(이마트는) 다른 업태나 경쟁업체를 막론하고 질 좋은 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판매하는 체질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의도는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보인다. 대형마트들이 할인전쟁을 시작한 후 해당 품목의 매출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같은 기간 대형마트의 전체 매출도 향상된 것으로 집계돼 가격할인 품목이 다른 상품의 판매도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분석된다.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는 지난 7일 가격경쟁의 포문을 연 이후 19일까지 전 점 매출은 지난달 같은 기간보다 12.1%, 구매고객 수는 9.2%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가격을 인하한 22개 제품의 매출도 전월 대비 크게 상승했다.

7일 가격을 낮춘 12개 품목은 품절사태가 벌어졌던 삼겹살과 만두 등을 중심으로 매출이 평균 두 배 뛰었고 15일 추가 인하한 10개 상품도 매출이 전달 대비 3배 수준에 달했다.

혁명적 가격인하 정책 성공하려면…

홈플러스도 이마트 할인품목에 대응해 할인행사에 돌입한 8일부터 19일까지 전체 매출이 지난달 같은 기간보다 5.4% 늘었다. 롯데마트에서는 7일 이마트의 가격인하에 맞춰 값을 내린 바나나·계란 등 10개 품목 매출이 19일까지 전월 같은 기간보다 119.5% 상승했다. 15일 2차로 가격을 할인한 7개 품목도 지난달 동기 대비 10배 이상 매출이 뛴 고구마와 오징어 등의 영향으로 181.9%의 매출 신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가격 인하에 대한 대형업체 세 곳의 반응은 엇갈린다. 홈플러스 측은 매출이 늘어난 것을 긍정적인 결과로 평가하면서도 “앞으로 지속적인 물량수급과 품질유지 문제에 대한 고민이 늘어 관련 대책 마련에 고심해야 하는 만큼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롯데마트 측은 “기존 전단행사를 기준으로 광고상품에 대해 10원이라도 더 싸게 하는 전략을 가져가고 있다”면서 “매일 시장조사를 통해 상대방 가격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이마트가 항상 최저가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마트 측은 “기본적으로 다른 업체의 가격과도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왜곡된 가격구조를 정상화하자는 게 목표”라며 “초기엔 우리 마진을 포기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낮은 가격을 제시하고, 이후엔 제조업체와 긴밀이 협력해 늘어난 물량에 맞게 가격을 낮춰 장기적인 구조로 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마트 측은 “우리뿐 아니라 경쟁업체도 가격인하 후 고객이 늘어난 것은 시장이 커질 수 있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 21일 “대형업체 간 가격경쟁은 바람직하다”며 최근 불거진 대형유통, 제조업체 간 납품단가 인하 문제에 개입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경쟁촉진을 통해 소비자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 정책 목표인 공정위 입장에서는 이마트나 CJ 같은 대형 유통업체와 대형 가공·제조업체 간 경쟁을 통한 가격인하는 바람직하다”며 “다만 대형 유통업체가 중소 납품업체나 영세 농민들에게 단가인하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경쟁을 통한 가격인하는 소비자와 유통업체는 물론 제조업체에 득이 된다. 다만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요구 등 대형 유통업체가 상대적으로 약자인 제조업체에 손실을 전가할 경우 가격인하는 오래갈 수 없다. 대형마트는 납품가 인하요구가 없다고 극구 부인하지만 치열한 경쟁에 들어서면 제조업체는 다양한 납품가 인하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관련기사 23쪽>

이런 구조가 되풀이되지 않고, 이마트의 ‘혁명적 가격인하 정책’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이마트는 물론 가격인하에 참여한 납품업체도 이익이 늘어야 한다. 장중호 마케팅담당 상무는 “제조업체가 소외된 가격인하가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마트 측은 “벌써 많은 업체가 자기 물품을 할인품목에 넣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2~3년간 이익 줄어도 가격인하 계속된다”

장중호 이마트 마케팅담당 상무

이마트의 가격인하 선언은 장중호 상무가 주도했다. 외국계 컨설팅회사에서 우리나라 굴지의 제조업체를 컨설팅해 왔고, 지난 1년간 신세계 유통연구소에서 대형마트, 할인점의 비즈니스를 연구한 결과다. 그에게 가격인하의 배경과 향후 전망을 들어봤다.

>> 이마트는 이 분야에서 1위 업체다. 굳이 이렇게 요란한 일을 안 벌여도 됐을 텐데….

“시장점유율이나 업계 순위만 보면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소비자다. 정용진 부회장과 최고경영층의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지가 강했다. 할인점의 본질은 ‘가격’인데 언제부턴가 우리도 서비스, 판촉, 행사 등에 무게중심이 옮겨가 있었다. 그래서 원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든 결정을 한 것이다.”

>> 2, 3위도 가만히 있는데….

“문제는 경쟁업체가 아니다. 현명한 고객이 ‘이마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느냐다. 지금 방식대로 가다가 5년, 10년 뒤에도 소비자들이 이마트를 찾을까, 그때도 여전히 1등일까를 생각해 보면 장담할 수 없다. 고객에겐 온라인, TV 홈쇼핑, 동네 수퍼 등 대안이 많다. 핵심은 고객과 우리의 문제지 업체 간 문제가 아니다.”

>> 얼마나 준비했나?

“3년 전부터 외국계 컨설팅도 받고, 정 부회장과 해외 벤치마킹도 수차례 갔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검토해 이번 일을 시작했다. 단순히 행사용 가격인하, 눈속임용 가격인하가 아니다.”

>> 기존 가격인하와 뭐가 다른가?

“지금까지 대형마트의 행사는 주기적으로 기획상품을 만들어 가격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환원하는 걸 반복했다. 이번에는 제조사의 원가와 마진을 유지하면서 최소 한 달 이상 동안 지속적으로 가격인하를 하는 방식이다. 행사에서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행사 이후 가격을 환원해 이익을 되찾는 구조가 아니라 가격을 인하한 상태에서 이익을 맞추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 가격이 낮아지면 제조사에 손해 아닌가?

“공장의 핵심은 가동률이다. 일정 수준의 물량과 가동률을 확보해 주면 원가는 떨어지게 돼 있다. 그러면서도 이익은 줄지 않는다. 이걸 잘하는 게 대형마트의 경쟁력이고, 공장의 매출과 이익을 늘리는 방법이다. 물론 소비자에게도 이득이 된다.”

>> 장기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닌가?

“그래서 처음에는 공장의 납품가를 내리지 않더라도 우리 마진을 포기하고 가격을 낮춰 물량을 늘리고 있다. 팔수록 손해 보는 제품이 있더라도 먼저 그렇게 가는 거다.”

>> 손해도 감수한다는 말인가?

“이미 연간 1000억원 정도 영업이익 감소를 각오하겠다고 발표했다.”

>>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나?

“2~3년 보고 있다. 경영층의 의지가 확고하다. 지금은 22개 품목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2만 개까지 최저가격(EDLP) 체제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 왜 d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나?

“업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전체 시장이 더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형마트의 매력을 되살려 소비자가 더 많이 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시장 자체가 커져 경쟁사들에도 득이 되리라고 본다.”

월마트 맞서는 ‘공격적 주류’ 자임

크로거 사례

크로거는 월마트와 다투는 미국 최대의 소매기업이다(2008년 기준). 대형마트인 이 회사는 모든 비즈니스 운영에 장기적인 관점을 중요시하는 회사다. 크로거는 ‘RIGHT STORE, RIGHT PRICE(적절한 점포, 적절한 가격)’라는 구호 아래 가격 및 회사 마진을 지속적으로 낮추어왔다.

이를 통해 월마트와 효과적인 경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총매출이 늘어 시장점유율은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크로거의 지속적인 가격인하 정책은 재고회전율을 높이면서 마진을 유지하기 위한 자체적 비용 감소 노력을 계속하게 했다. 크로거가 추구해 온 방향은 가격인하를 통해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여 ‘공격적인 주류’가 되자는 것이었다.

할인점의 업태상 높은 마진율보다는 높은 시장 점유율을 택한 것이다. 보다 낮은 가격이 전략이고, 보다 높은 회전율이 전술이며, 결과물은 보다 개선된 브랜드인 셈이다.

이석호·임성은 기자·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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