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모든 시련을 이겨낸 마지막 장면. 국립오페라단의 이소영 단장은 꽃가루로 뒤덮이는 환상을 그려내며 과감한 연출을 선보였다. 뒤로 갈수록 무대의 힘이 살아났지만 초반부에는 아쉬움도 남았던 공연이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무엇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압권이었다.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모두가 기대한 꼭 그만큼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정명훈이 만들어서 펼쳐놓는 소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모차르트의 바로 그 음악이었다.
테너 김재형
그러나 이도메네오의 아들 이다만테로 분장한 메조소프라노 양송미는 소리와 연기가 모두 덜 다듬어져 있었다. 일리아의 연적 엘레트라를 맡은 헬렌 권은 명성과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딱히 일리아라기보다 모차르트에 맞는 소리를 가졌다 싶은 임선혜는 작은 성량이 아쉽긴 하지만 자신의 맑고 깨끗한 소리에 맞는 발성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타고난 소리와 성량이 풍부한 헬렌 권은 소리를 그저 밀어내기만 할 뿐 당겨서 몸에 붙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발성의 문제는 양송미도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곧바로 소리와 가사의 전달에 문제를 가져왔다. 소리가 앞으로 쭉 뻗어나가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흩어져 버리니 소리에 실려야 할 가사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이 오페라는 특별히 시작이 중요하다. 막이 오르자마자 일리아가 등장해서 이야기의 앞뒤와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하니 여기서 자칫 긴장을 놓쳐버리면 한참을 지루하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조명 아래 무대 깊숙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무용수들 속에서 일리아가 모습을 드러내면 시선이 집중되리라 생각했겠지만,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한 잠시의 호기심은 곧 사라지게 된다. 일리아가 혼자 넓은 무대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몸을 뒤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주의력을 흩트려 산만하게 만들 뿐이다. 차라리 일리아가 무대 앞으로 나와 노래로만 승부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길고 지루한 대본을 극복하고 남을 만큼 위대한 모차르트의 음악을 믿어야 했다.
1막의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가수들을 가능한 한 무대 앞으로 세워야 소리라도 제대로 들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조명이 너무 어둡고 무대의 장치와 활용이 지나치게 단조롭다 했더니 2막 끝 부분에 반전이 숨어 있었다. 2막에서는 무채색의 색조가 빨갛게 바뀌는가 싶더니 무대 바닥이 위로 솟아올랐고 눈부시도록 밝은 조명을 갑자기 스크린으로부터 객석 정면을 향해 비추기도 했다. 기다린 시간만큼 더 큰 만족을 가져다 주리라 생각했겠지만, 참고 견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다 보상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헤픈 것은 부족하니만 못하다. 하지만 이보다는 더 섬세하고 더 많은 변화가 앞서부터 있었어야 했다. 영상도 조금은 더 활용했어야 했다. 예컨대 풍랑이 그치고 해변으로 떠밀려온 이도메네오가 등장하는 장면이라면 구름이 빠르게 몰려오는 영상도 기상의 변화에 맞춰 바뀌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가수들의 선택이다. 유명하다고 다 통할 수는 없고 잘한다고 다 잘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어로 노래해야 하는 오페라인데 주요 배역이 다 독일어권에서 공부를 한 성악가들이다. 워낙 메조소프라노가 없으니 양송미의 선택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헬렌 권은 아직도 아쉽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