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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125> 6·25 발발 3일 만에 서울 빼앗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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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1950년 6월 28일 서울로 진격한 북한군 T-34 탱크. 당시 국군은 이 탱크를 부술 무기 체계를 갖추지 못해 특공대가 전차에 뛰어올라 해치를 열고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집어넣어 파괴해야 했다. [중앙포토]


6·25 당시 남북 무기 살펴보니

북한의 남침에 의해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졌을 때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군의 병력은 10만3827명이었지만 북한군은 2배에 가까운 20만1050명이었습니다. 북한군은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도 국군에 비해 월등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48년 창설된 국군이 미처 군대를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과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육군의 사단을 8개로 늘렸습니다. 그렇지만 무기는 완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국군의 무기는 구 일본군의 99식 소총과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러 왔던 미군이 지원한 무기 일부였습니다.

국군의 부실한 무장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49년 4월 조병옥 박사를 미국에 특사로 보냈습니다. 무기와 탄약 등을 지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은 5만 명 병력에 대한 무기 및 장비와 6개월분의 보급품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기나 전차 등 중요한 무기는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보급품도 그동안 공비를 토벌하면서 많이 사용해 1∼2일분 정도만 비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군 보유 대포, 국군의 8배

이에 비해 북한군은 구 소련제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 군사고문단 3000여 명의 도움으로 북한군을 훈련시켰습니다. 더구나 북한군 핵심 7개 사단 병력 가운데 3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 등에서 각종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자였다고 합니다. 소련은 북한에 소총은 물론 신형 전차·장갑차·대포·전투기·함정 등 일체의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북한을 먼저 공산화한 뒤 한반도 전체로 확대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6·25 전쟁이 일어날 때는 남북한 사이에 큰 군사력 격차가 생기게 됐습니다. 그때 육군 위주였던 국군은 대포 구경이 105㎜인 M3 곡사포 91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은 구경이 더 큰 122㎜ 곡사포 등 대포 728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더 심각했던 일은 국군의 M3 곡사포의 사거리가 6.5㎞인 데 비해 북한군 대포들은 9∼13㎞로 거의 두 배나 멀리 쏠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국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포를 더 많이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북한군이 보유한 박격포는 1728문으로 국군의 960문에 비해 1.8배나 많았습니다. 또 북한군의 박격포는 구경이 82㎜와 120㎜로 국군이 갖췄던 60㎜와 81㎜ 박격포보다 크고 사정거리도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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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1개 사단 전투력, 남한의 2배

탱크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인 대전차포와 무반동총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탱크란 전차를 말합니다. 대전차포는 대포처럼 생겼습니다. 무반동총은 로켓탄을 쏠 때 나오는 화염과 가스가 총의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반동력이 없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전차포와 무반동총은 적 탱크가 오는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가까이 오면 발사해서 탱크의 장갑을 뚫어 파괴합니다. 따라서 적 탱크를 파괴하기 전에 발각되면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북한군의 45㎜ 대전차포는 최대 5㎞까지 쏠 수 있고 500m 거리에서 6.6㎝ 두께의 강철판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국군은 탱크를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방호물은 북한군의 대전차포에 파괴됩니다. 이에 비해 국군은 구경 37㎜ 대전차포와 57㎜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포 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군의 대전차 무기는 관통력이 약해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육군 사단은 북한이 남한보다 2배 이상 전투력이 강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공군을 보면 북한군은 야크 전투기 40대와 폭격기 70대, 정찰기 10대 등 모두 180대의 소련제 항공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군의 항공기는 건국기 10대와 연락기 등 32대에 불과했습니다. 해군도 북한군은 초계정 16척과 어뢰정 등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우리 해군은 미국에서 지원해준 구축함·초계함 등 전투함 2척과 소해정·상륙정 등 지원함 32척 등 모두 34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북 T-34 탱크, 아군 대전차무기로 막기에 역부족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부터 38선과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공격해 왔습니다. 북한군은 먼저 국군을 향해 대포를 마구 쏘았습니다. 그러나 국군의 105㎜ 대포의 사거리는 북한의 122㎜ 곡사포와 76㎜ 평사포의 절반 수준이어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군이 구축해 놓은 진지는 북한군이 쏜 대포에 파괴되고 불바다가 됐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북한군의 대포 600문과 박격포 1000여 문이 불을 뿜었다고 합니다. 전쟁 기록을 보면 전투에서 발생하는 피해의 3분의 1 정도가 적의 대포 사격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또 북한군의 소련제 전투기인 야크기와 폭격기가 아군을 공격해 기세를 잡았습니다. 전투기를 요격할 수 있는 대공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침 미군의 F-51 전투기가 와서 공중에서 대응하기는 했지만 초반엔 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북한군은 국군의 전방 진지가 대포 사격으로 흐트러지자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내려왔습니다. 국군의 전투력으로는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방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더구나 북한군의 T-34 탱크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 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를 부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군은 북한군의 탱크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특공대를 조직해 T-34 전차 위에 뛰어올라 뚜껑을 열고 화염병이나 수류탄을 직접 집어넣는 것이었지요. 목숨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남북한의 전투력 차이로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남한은 북한군에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 다리를 끊고 낙동강까지 후퇴했습니다.

전쟁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역전됐습니다. 북한군의 T-34보다 우수한 미군의 M46 탱크가 투입됐고 M114 곡사포도 북한의 대포보다 사거리가 길었습니다. 미군의 전투기도 대거 투입됐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 해군이 북한 함정을 바다에서 모두 제거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국군을 당혹케 한 71연발 ‘따발총’

6·25전쟁 때 북한군과 중공군이 들고 있었던 무기는 ‘따발총’이었습니다. 따발총은 총을 쏠 때 화로에 밤을 구울 때처럼 ‘탁탁탁’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따발총은 옛 소련군이 핀란드에서 싸우기 위해 1941년 개발한 PPSh-41 반자동 기관단총입니다. 추운 겨울에 핀란드의 우거진 숲 속에서 근접전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고안됐습니다. 유효사거리가 짧고 정확도는 낮지만 연발 사격이 가능해 가까이 가서 무차별 사격을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국군의 M1이나 카빈 소총은 멀리 쏠 수 있지만 한 번에 여러 발 사격하기에는 불리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소지했던 따발총과 중공군의 것은 모양이 달랐습니다. 북한군의 따발총은 소련제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탄창이 둥근 원판형으로 생겼습니다. 핀란드가 만든 M31 수오미 탄창입니다. 직경 7.62㎜에 길이 2.5㎝인 탄환 71발을 감아서 탄창에 장전합니다. 그런데 드럼형 탄창은 가끔 고장을 일으킵니다. 중공군은 드럼형 탄창을 막대형으로 바꿨습니다. 중공군은 PPSh-41을 옛소련에서 도입해 탄창을 막대형으로 바꾼 Type-50을 1950년부터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따발총은 개전 초반에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국군의 전력이 안정되면서 그렇지 못했습니다. 낮에 남북한 군이 일정 거리를 두고 싸울 때면 국군의 M1 소총보다 정확도가 낮고 사거리가 짧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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