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기 경쟁보다 가르치기 경쟁 불붙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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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강모(22·여)씨는 지난해 2학기 전공 교수의 북한학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어도 수업 시간 외에는 교수를 만날 수 없었다. 면담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연구실에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씨는 “교수가 교과서를 읽는 식으로 수업을 했는데 시험도 책과 똑같이 써야 점수를 잘 줬다”며 “보고서도 연구실 문틈에 끼워 놓은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대학의 한 교수는 “학생이 찾아와 논문 작업을 방해할까 봐 일부러 실험실 같은 곳에 머무는 교수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올해 학생을 잘 가르치는 대학 10곳을 뽑아 총 3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교수들이 학생 지도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교수들이 연구 실적 올리기에 매달리면서 이 같은 현상이 심화돼 왔다. 정부가 1999년부터 ‘두뇌한국(BK)21’ 등 연구사업의 지원 대상을 선정하면서 과학색인인용지수(SCI)급 논문 실적을 비중 있게 반영하자 대학들이 교수 평가 때 교육 성과보다 논문 실적을 중시한 것이다. 교수들 사이에선 “논문 실적을 올리면 연구비 수천만원이 떨어지지만 ‘베스트 티처’로 선발돼 봤자 총장과의 식사 한 끼가 전부”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학생들은 강의가 부실해졌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은 “대학이 연구비에 따라 서열화되면서 학부 수업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비싼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은 잘 가르치는 교수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전재식 박사는 “최근에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잘 안 돼 등록금 대비 대학 교육의 투자 수익률이 10년 전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며 “대학이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까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교과부가 잘 가르치는 대학을 매년 뽑아 지원하면 대학들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울산대 박종희 교무처장은 “공개만큼 강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며 “올해부터 강의 평가와 자료를 모두 홈페이지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승철 성균관대 교무처장은 “대학들이 뽑기 경쟁보다 가르치는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올해 모든 강의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한동대 김영섭 학사부총장은 “SCI급 논문을 쓰면 보너스를 두둑이 주는 반면 ‘베스트 티처’에 대한 배려는 적은 것이 문제”라며 “잘 가르치는 교수에게 해외 연수 등의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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