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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연구생 실력은 프로 상위권 ‘마이너리그’같은 뛸 무대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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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기원 ‘연구생’이 다시 화제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주 “이창호 9단, BC카드배 세계대회서 아마추어에게 져 1회전 탈락”이란 충격적인 소식이 도심 뉴스 전광판에 떴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골프의 타이거 우즈가 컷오프되고 테니스의 샤라포바가 1회전 탈락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바둑은 그럴 수 없다고 믿는 탓이었다. 프로기사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바둑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창호를 꺾은 이 아마추어가 바로 연구생이다. 충암고 1학년에 재학 중인 한태희(사진)군이고 현재 연구생 서열 8위다.

연구생은 바둑계의 뜨거운 감자다. 한국기원은 낙후된 바둑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기 영재 교육체계라 할 연구생 제도를 1986년 도입했고 그해 11세의 이창호 9단이 연구생 1호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세돌·최철한·강동윤·박정환 등 한국 바둑의 엘리트들은 모두 연구생 제도를 통해 프로가 됐다. 연구생 제도는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를 성공시킨 동력이었다. 연구생은 1~10조까지 각 조 10명으로 모두 120명. 치열한 경쟁을 통해 매달 순위가 바뀐다. 이들은 프로의 ‘쯩’만 없을 뿐 엄밀히 아마추어는 아니다.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해 프로세계에 첫발을 디딘 안형준과 한웅규가 현재 랭킹 15위와 16위에 올라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된다. 입단 경쟁에서 밀린 연구생 상위 실력자들 중엔 이들과 비슷한 실력자가 꽤 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연구생들은 오랜 세월, 프로대회는 물론이고 아마대회도 참가하지 못했다. 한데 지난해 비씨카드배가 출범하면서 연구생을 포함한 모든 아마추어에게 사상 처음으로 문호가 개방됐고 곧 삼성화재배와 LG배 등 다른 세계대회로 확산됐다. 이번 2회 대회에서도 아마추어 5명이 프로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64강에 진입했는데 이 중 4명은 연구생이고 1명은 연구생 경력이 있는 아마기사다.

돌풍이 기대됐던 이들 5명은 공교롭게도 현역 최강의 프로들과 만났다. <표 참조> 예선에서 이영구 8단과 위빈 9단을 연파했던 연구생 1위 나현은 일본 최연소 명인 이야마 유타 9단에게 졌고 연구생 2조로 서열 13위인 이주형은 이세돌 9단과 339수까지 가는 접전 끝에 3집 반을 졌다. 연구생 3조로 서열 30위인 최현재는 중국 최강 구리 9단에게 1집 반을 졌지만 대단한 선전이었다. 연구생 1, 2조도 아닌 3조가 본선 64강에 들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연구생 출신의 박영롱과 대국했던 박영훈 9단은 “연구생이 센 것은 일반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탓에 대국 때 부담감이 적었다”고 말한다. 프로들은 오랜 세월, 아마에게 지는 것을 수치로 여겨왔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윤준상 7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연구생의 참가는 여러모로 좋다. 연구생에게 기회와 경험을 주고 프로에겐 자극제가 된다”고 말한다. (이창호 9단이 96수에 던진 것을 두고선 “조금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나 같으면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바둑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 깨끗이 포기한 것 아닐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둑계가 연구생들에게 이들처럼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첫째로 연구생은 실력은 있으나 뛸‘그라운드’가 없다. 또 이세돌 9단과 맞섰던 이주형은 한국기원 규정상 이미 ‘만 18세’ 데드라인에 걸렸다. 간신히 1년을 연장했지만 이 1년 안에 입단하지 못하면 연구생을 떠나야 한다. 입단의 문은 좁아 병목현상이 치열한데 시간이 차가는 초조한 연구생들은 줄줄이 있다.

바둑은 스포츠가 되었지만 한국기원의 분위기는 아직 스포츠가 아니다. 세미 프로든 마이너 리그든 스포츠다운 제도가 필요하지만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다. 참고로 연구생들은 우승을 해도 상금은 없다. 다만 ‘세계 8강’에 오르면 입단 자격이 주어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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